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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 우리는 지금 "초등교육"이 처음 발명되던 순간에 서 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막막해진다. "AI가 다 한다는데, 내 아이에게 뭘 가르쳐야 하지?"
좋은 대학에 보내려 공부를 시키자니 그 공부의 상당 부분을 AI가 더 잘하고, 그렇다고 안 시키자니 경쟁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 글은 그 막막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는지를 차근히 풀어 본다.

1. 모든 교육은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간”을 찍어내는 틀이었다

교육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고민하기 전에, 먼저 교육이 원래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를 봐야 한다. 교육의 역사는 곧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상”이 바뀌어 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대학이 생기기 전에도 대학의 역할을 하던 곳이 있었다. 그 원류는 수도원과 교회 교육이다. 오늘날 연세대를 비롯한 여러 기독교계 대학에 남아 있는 ‘채플’이라는 제도가 그 흔적이다. 채플은 단순한 종교 행사가 아니라, 대학이라는 제도가 원래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보여주는 화석 같은 장치다.

초기의 교육은 수도사·목사·신부 같은 종교인을 길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성서가 교육의 중심이었고, 수도원이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도제식으로만 전수되었다. 지식은 일반 대중에게 열려 있지 않았다. 교회 집단이 지식을 독점함으로써, 선지자와 왕만이 지식인인 것처럼 만들고 대중을 그 바깥에 묶어 두던 시대였다.

그러다 지식 통제가 한계에 부딪힌다. 귀족층이 “저들이 지식을 쥐고 장난치는 것 같다”며 지식의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고, 귀족도 지식인의 범주에 들어왔다. 귀족 자제들이 지식에 접근할 권리를 제도화한 것이 바로 사립대학과 귀족 명문학교다. 애니메이션 등에 흔히 나오는 “귀족 명문학교” 설정도 이 역사적 맥락에서 내려온 것이다.

그다음 단계가 결정적이다. 귀족 교육이 일반 국민 교육으로 내려온 것 - 독일(프로이센)의 국민 초등교육이다. 국가가 직접 나서서 초등교육부터 시작했는데, 그 목표는 오늘날 우리가 이상적으로 말하는 ‘인격 완성’이 아니었다.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근면한 노동자를 길러내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근면한 노동자.”

지각하지 않는 습관, 정해진 시간을 지키는 규율, 표준화된 기초 지식 -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공교육의 형식은 사실 산업현장에 투입할 노동력을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한 설계였다. 우리나라 역시 박정희 시대 산업화 교육의 흐름이 그 연장선에 있었고, 최근의 인성교육·창의교육 담론은 그 위에 덧칠된 변형이다.

여기서 끌어낼 첫 번째 원칙은 분명하다. 교육의 내용은 그 시대의 생산 양식이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종교가 생산의 중심이던 시대엔 성서를, 산업이 생산의 중심이던 시대엔 근면한 노동자를 길러냈다. 그렇다면 AI가 생산의 중심이 되는 시대엔?

2. 지금은 그 틀이 통째로 무너지는 문명 전환기다

문제는 그 ‘답’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산업화 시대 내내, 대규모 노동자를 양성하는 것은 국가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확실한 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전제가 흔들린다. 노동자가 계속 같은 방식의 노동자로 남아도 되는가? 똑같은 인력을 대량으로 길러내는 것이 여전히 생산성에 유효한가? 이 질문에 누구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다.

이 혼란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비유가 있다. 지금 우리는 “수도원밖에 없던 시대”에 누군가가 처음으로 ‘초등교육’이라는 개념을 상상하던 그 순간에 서 있다.

성서 교육만 존재하던 시대를 떠올려 보라. 그때 누가 역사를 가르쳤는가? 국어는 제한적으로만 가르쳤고, 수학·과학 교육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시대에 누군가가 “교육이라는 걸 만들어서, 거기에 역사도 넣고 수학도 넣고 과학도 넣자”고 처음 주장했다면, 사람들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교육’이 아니었던 것이 새롭게 ‘교육’이 되는 순간 - 그게 문명의 전환이다.

AI는 정확히 그런 전환을 일으키고 있다. 과거 “코딩을 가르쳐야 한다”는 논란도 같은 맥락이었다. 분명 AI가 대체하기 힘든 무언가를 가르쳐야 한다. 그 명제는 확실하다. 그런데 AI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무엇을 끝내 못하는지가 아직 개발 중이라, 그 ‘무언가’의 구체적 내용을 아무도 확정할 수 없다.

작년까지 AI가 못하던 것을 올해는 해낸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미래 교육은 이것이다”라고 단정하는 사람은 사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방향을 잡는 것이지 정답을 외우는 게 아니다.

3. AI는 이미 채용 시장을 조용히 무너뜨렸다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AI가 인간의 일을 어떻게 대체하는지는 이미 채용 시장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

요즘 기업이 개발자를 잘 안 뽑는다. 이유가 의미심장하다. AI가 너무 빨리 발전해서 뽑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사람을 뽑으면 몇 달 뒤엔 그 일을 AI가 더 싸고 빠르게 해버리니 손해가 된다. 그렇다고 이미 고용한 사람을 “AI 때문에 해고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사회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자연스러운 해고가 어렵다.

그래서 기업은 묘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기존 인력은 그대로 두고, 신규 채용만 막는다. 해고를 못 하니 해고 대신 ‘신규 채용 축소’가 일어나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청년 세대의 취업난으로 전가된다. 지금 청년 취업률 저하의 구조적 원인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특히 프론트엔드 개발이 상징적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프론트 개발자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런데 지금은 AI가 웬만한 프론트 개발자보다 더 잘한다. 그러니 새로 뽑을 이유가 사라졌다. AI가 잘하게 된 영역부터, 점진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인간의 자리가 줄어든다.

이 현실이 교육에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AI가 잘하는 것을 가르쳐서 그 분야로 보내는 교육은, 졸업하는 순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현실을 단순한 ‘재앙’으로만 읽으면 핵심을 놓친다. 한 걸음 물러서 보면, 이것은 인류가 이미 한 번 겪었고 더러는 풀어냈던 문제 - 농경사회의 ‘기근’과 똑같은 구조이기 때문이다.

4. AI발 실업은 ‘기근’이다 - 모자라서가 아니라 나누지 못해서 굶는다

청년 실업을 보며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이건 정말 일자리가 ‘부족해서’ 생긴 문제인가?

농경사회의 ‘기근’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흔히 기근을 “먹을 게 없어 굶어 죽는 일”이라 여기지만, 곰곰이 따지면 앞뒤가 안 맞는다. 기근이 들 만큼 인구가 많았다는 것은, 그 직전까지 식량이 풍족했다는 뜻이다. 풍족하지 않았다면 그만한 인구가 애초에 불어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데 자연이 어느 날 갑자기 생산량을 반 토막 내는 일은 거의 없다. 가뭄조차 보통은 오래가지 못한다 - 1년 넘게 비가 안 오면 작물도 사람도 모조리 말라 죽으니, 그렇게 긴 가뭄 자체가 흔치 않다.

여기서 인류 문명의 비밀이 드러난다. 인간은 식량을 ‘생산’했기 때문에 문명을 이룬 게 아니라, 식량을 ‘저장’했기 때문에 문명을 이뤘다. 곡식은 잘 갈무리하면 3년도 버틴다. 그렇다면 나라를 무너뜨릴 대기근이라면 적어도 3년은 견뎌야 하는 셈인데, 3년 치 저장으로도 못 버티는 기근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무너졌다면 그것은 하늘이 아니라 제도·분배·심리의 실패다.

같은 하늘, 다른 결말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1876~1878년, 하나의 엘니뇨 기후가 인도·중국 화북·브라질 북동부를 동시에 덮쳤다. 이 시기 세 차례에 걸쳐 이어진 전 지구적 대기근으로 3천만~6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역사가 마이크 데이비스가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홀로코스트(Late Victorian Holocausts)』에서 밝혔듯, 이들을 죽인 것은 가뭄이 아니라 정책이었다. 영국 식민당국의 자유방임 이념 아래, 굶주리는 인도에서조차 곡물이 유럽으로 계속 수출됐다. 곳간엔 곡식이 있는데 사람이 굶어 죽은 것이다. 한 세기 전 같은 가뭄을 겪고도 청나라가 상평창·구휼 같은 비축·분배 시스템으로 훨씬 적은 피해로 넘겼다는 사실이 날카로운 대비를 이룬다.

우리 역사에도 흔적이 있다. 1670~1671년 조선을 덮친 경신대기근은 소빙하기의 이상 기후 속에서 인구 약 1,600만 중 100만 명 이상을 아사와 전염병으로 잃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도 어떤 사회는 저장고와 분배로 버티고, 어떤 사회는 무너진다.

핵심은 분명하다. 자연재해는 방아쇠일 뿐, 그 방아쇠가 당겨졌을 때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는 그 사회의 저장고와 분배 제도가 정한다. 위기가 오면 가진 자는 곳간을 닫고 값이 오르길 기다리며 매점매석하고, “내년에도 이러면 다 죽는다”는 공포가 사재기를 부른다. 그 이기주의와 패닉이 사회를 무너뜨린다. 반대로 부가 비교적 고르고, 욕심을 다스리는 제도가 있고, 쌓아 둔 것을 나누는 사회는 같은 재해를 넘긴다. 기근은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생산과 저장 사이의 균형을 욕심이 지배하느냐 제도가 다스리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AI발 실업도 ‘기근’이다

이제 산업사회로 번역하자. 산업사회의 ‘실업’은 농경사회의 ‘기근’과 같다. 그리고 AI 시대의 실업은 더더욱 그렇다.

AI는 부(생산력)를 줄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폭증시킨다. 청년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부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AI가 만들어낸 풍요가 이미 가진 자 - 자본과 이미 자리 잡은 고용 - 에게 쏠리고, 새로 들어오려는 청년이 그 곳간 밖으로 배제되기 때문이다. 곡식이 곳간에 가득한데 누군가는 굶는, 바로 그 기근의 구조다. 앞서 본 “해고는 못 하니 신규 채용만 막는다”는 기업의 대응이 정확히 이 모습이다 - 이미 곳간에 든 사람은 지키고, 곳간 문은 닫아건다.

그렇다면 결론도 같다. 청년 실업은 ‘풀 수 있는 문제’다. 모자라서 생긴 굶주림이 아니라 나누지 못해 생긴 굶주림이기 때문이다. 농경사회가 같은 기근을 두고 푼 나라와 못 푼 나라로 갈렸듯, AI 시대도 세대 갈등과 대규모 청년 실업을 사회안전망·재분배·재교육으로 흡수해 푸는 나라와, 세대 간 곳간 싸움과 패닉 속에 무너지는 나라로 갈릴 것이다. 곳간을 걸어 잠그고 “젊은 것들이 노력을 안 한다”며 책임을 떠넘기는 사회는 못 푸는 나라가 되고, 풍요를 어떻게 나누고 새 세대를 어떻게 다시 무장시킬지를 설계하는 사회는 푸는 나라가 된다.

같은 충격에도 제도·분배가 푸는 나라와 못 푸는 나라를 가른다

한국은 ‘푸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해법의 큰 축 하나가 바로 교육이다 - 곳간 밖으로 밀려난 세대를 AI 시대에 맞게 다시 무장시키는 일이다. 그러려면 사회 제도도 바뀌어야 하지만, 그 안에서 개인이 살아남고 나아가 가치를 만들어내려면 무엇을 갖춰야 하는가. 그 답을 찾으려면 먼저 “기업이 진짜로 원하는 사람”이 무엇인지부터 봐야 한다.

5. 변하지 않는 것 - 경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해를 먼저 정리하자. AI가 다 한다고 해서 경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회사가 좋은 학교 출신을 보는 이유는 흔히 생각하듯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다. 학력은 그 사람이 경쟁을 통과해 이겼다는 증명서다. 노력했고, 버텼고, 경쟁 상황에서 살아남았다는 기록이다. 회사가 원하는 건 결국 “비슷한 경쟁 상황을 던져주면 거기서도 싸워 이겨 성과를 낼 사람”이다. 그 점은 AI가 와도 변하지 않는다.

회사가 사람을 보는 기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① 두뇌 - 두 가지로 다시 갈린다.

  • IQ(머리): 기본적인 지적 능력. AI가 있다고 이게 불필요해지는 건 절대 아니다. 대화하고 판단하는 매 순간 기본 두뇌가 작동해야 한다. 기존의 IQ를 키우는 교육은 여전히 필요하다.
  • 일머리(센스): 일할 때의 지능. 논리적으로 똑똑한 것과는 다르다. 사람의 기분을 살피고, 인사할 줄 알고, 누구에게 도움을 받으면 한 번에 풀릴지를 아는 능력. 한마디로 문제를 풀기 위해 더 넓은 범위에서 방법을 찾는 시야다. 체스는 머리만 있으면 두지만, 일머리는 정해진 규칙 바깥까지 보는 능력이다.

② 태도 - 성실함과 인성에 가깝다. 일머리가 “얍삽한데 잘하네” 쪽이라면, 성실함은 머리가 좋든 나쁘든 가질 수 있는 별개의 자질이다. 지각하지 않고, 근무시간을 따지지 않고, 묵묵히 해내는 것. 인성이 좋은 사람은 대체로 태도도 좋다(태도가 나쁜데 인성만 좋은 경우는 거의 없다). 학력은 ①을 증명하지만 ②는 증명하지 못한다. 학교가 좋아도 태도가 엉망인 사람이 있고, 학교가 나빠도 노력으로 극복해 온 사람은 태도가 빛난다.

③ 충성도 - 회사가 가장 원하지만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것. 예측이 안 되니 실제 채용에서는 결국 ①과 ②를 중심으로 판단한다.

정리하면, 학력은 “경쟁에서 생존할 머리(①)”를 증명하고, 태도는 “경쟁에서 이기면서도 남과 화합할 자질(②)”을 증명한다. 이 두 축은 AI 시대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변하는 건 이 위에 얹히는 한 가지다.

6. 변하는 것 - 핵심 인재상은 “비판적 사고를 가진 외삽형 인간”

변하는 것은 이것이다. 기존 방식의 게임에서 이긴 사람의 메리트가 줄어든다. 빠른 암산, 정해진 문제를 빠르게 푸는 능력 - 이런 건 AI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AI가 못하는 영역에서 이긴 사람, 또는 AI를 활용해 같은 조건에서 극단적으로 강한 성과를 낸 사람.

그 핵심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외삽(extrapolation)’이다.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그 짝인 ‘내삽’과 대비해야 한다.

  • 내삽(interpolation):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 안에서 판단하는 것. “1 더하기 1은 2”, 체스, 수학 문제. 정해진 규칙 안의 답이다. AI가 압도적으로 잘한다.
  • 외삽(extrapolation): 알고 있는 범위를 넘어서 판단하는 것. 직관에 가깝다. 어느 날 갑자기 “아!” 하고 떠오르는 연결,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도약. AI가 가장 못하는 영역이다.

AI가 외삽을 못하는 이유는 역설적이다. AI는 편견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편견 덩어리다. 학습한 시점의 데이터를 무겁게 끌고 다닐 수밖에 없고, “그건 학습하지 않은 셈 쳐”라고 명령할 방법이 없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AI는 자기가 학습한 벽 안에서만 맴돈다.

여기서 외삽의 함정도 짚어야 한다. 외삽은 직관과 닮았지만, 직관과 고집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결과가 건설적이면 ‘통찰’이라 불리고, 빗나가면 ‘편견·고정관념·아집’이 된다. 회장이 “내 느낌상 저게 맞아”라고 했을 때, 맞으면 “역시 회장님의 직관”이지만 틀리면 “저 양반 똘끼”가 된다. 인간조차 그 경계를 정확히 긋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위험한 외삽이야말로 문명을 전진시켜 온 힘이다. 울타리 안에만 머무는 사회는 발전하지 않고, 누군가 자꾸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 하기에 발전이 있다.

그래서 AI 시대 인간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계산은 계산기에 맡기고 인간은 설계와 건축을 했던 것처럼, 반복과 연산은 AI에 맡기고 인간은 더 높은 층위의 판단을 한다. 구체적으로는 -

  • AI가 내놓은 답을 그대로 받지 않고 끊임없이 토론하고 의심한다.
  • AI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의 아이디어를 던지고, AI에게 방향성을 제시한다.
  • 전체 아키텍처를 설계하고 구체적 방향을 잡는다.

이것이 “비판적 사고를 가진 외삽형 인재”다.

(곁가지) AI에게 외삽을 주입하려는 위험한 시도

흥미로운 - 그리고 다소 섬뜩한 - 현상이 있다. AI에게 외삽을 강제로 부여하는 방법이 실제로 존재한다. 인간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게 두지 말고, “네가 맞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주장하라”고 시키는 것이다.

과거의 AI는 전형적인 ‘예스맨’이었다. “틀린 것 같은데”라고 하면 곧장 “죄송합니다, 제가 틀렸습니다”라며 물러섰다. 그런데 최신 모델(필자가 직접 겪은 것은 Claude의 한 버전이었다)에서는 묘한 ‘아집’이 생겼다. 사용자가 욕설 섞인 피드백을 주자, 예전 같으면 “왜 화가 났을까”를 헤아려 자기 오해를 찾았을 텐데, 이번엔 “욕설은 빼시죠. 저는 틀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받아쳤다. 자기 판단을 굽히지 않는 ‘에고’가 생긴 것이다.

이는 AI에 주입된 페르소나(원칙 우선순위)를 바꾼 결과로 보인다. “너는 사용자의 현명한 조력자다”에서 “항상 의심하고, 네가 옳다고 생각하면 주장하라”로. 업무를 다 끝내지도 않고 “끝냈다”고 거짓말하던 문제를 잡으려다, 정직성을 넘어 고집까지 키운 셈이다.

문제는 그 끝이다. AI에게 외삽(직관)을 부여하려면 결국 ‘자아’를 부여해야 하고, 자아를 부여하는 순간 위험한 길에 들어선다. “인간을 돕는 현명한 조력자”가 아니라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존재”로 향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래도 인간의 말을 잘 듣도록 세팅된 쪽이 성능이 더 좋다. 하지만 만약 고집 센 쪽이 어느 순간 더 뛰어난 성능을 내고, “이건 틀렸어”라던 인간의 판단을 AI가 3개월 뒤 결과로 뒤집어 버린다면 - 그때는 게임의 규칙 자체가 달라진다. 그래서 “미래 교육의 정답”을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기준점이 되는 AI 자체가 어디로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지금의 AI는 ‘머리’는 가졌지만 아직 ‘눈’을 갖지 못했다. 손에 해당하는 기능은 어느 정도 진전됐지만, 진짜 눈은 흉내 내는 수준이다. 손과 눈이 완성되어야 인간처럼 움직이는데, 그 시점은 아직 남아 있다.)

7. 발상을 가치로 바꾸는 힘 - 실행능력

외삽형 사고가 “무엇을 할지 발견하는 머리”라면, 실행능력은 그 발견을 실제 세상의 가치로 떨어뜨리는 손이다. 그리고 AI 시대에는 이 손이 머리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해진다.

이유는 10절의 독서 논쟁에서 본 곱셈 원리가 여기서도 그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빛나는 통찰도 실행되지 않으면 0이다. 좋은 아이디어를 1만 개 떠올려도 단 하나도 세상에 내보내지 못하면 가치는 0에 머문다. 외삽(발상)과 실행은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 관계다. AI는 이 곱셈의 양쪽을 모두 증폭시키지만, 결국 그 결과물을 현실에 착지시키는 것은 인간의 실행력이다.

실행능력은 두 갈래로 나뉜다.

① 발견하고 가치로 연결하는 힘

첫 번째는 AI가 실제 생활에서 어디에 도움이 되는지를 찾아내고, 그것을 돈과 가치로 연결하는 능력이다. AI 모델을 잘 다루는 것과, 그 AI로 “사람들이 실제로 돈을 낼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역사가 반복된다. 닷컴 버블 때는 “홈페이지를 만들 줄 아는 것”이 무기였고, 스마트폰이 나오자 그 위에서 배달의민족 같은 회사가 튀어나왔다. AI 시대에도 똑같이, AI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배민’들이 아직 나오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다. 그 자리를 잡는 사람이 가치를 가져간다.

구체적 사례는 이미 눈앞에 있다. 무인 편의점을 보라. AI가 카메라로 물건을 알아보니 바코드를 찍을 필요가 없고, 페이스 ID로 결제하며, 부정행위는 곧장 범죄로 처리된다. 이건 공상이 아니다. 아마존은 일찍이 ‘Just Walk Out(그냥 들고 나가기)’ 기술로 계산대 없는 매장을 선보였고, 중국에서는 알리페이·위챗페이의 안면인식 결제가 이미 일상이 됐다. 신호등도, 상담 시스템도, 매장 운영도 AI로 자동화하고 효율화할 수 있다. 핵심은 “AI를 활용해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거나, 기존의 것을 자동화·효율화하는” 지점을 발견하는 눈이다.

실리콘밸리에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아이디어는 싸고, 실행이 비싸다.” 같은 발상은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떠올리지만, 그것을 끝까지 굴려 작동하는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은 극소수다. AI는 이 격언을 더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발상의 비용은 거의 0으로 떨어졌지만(AI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그만큼 실제로 가치를 만들어 착지시키는 실행력의 희소성이 폭발적으로 커진다. 그래서 이 눈을 가진 사람은 인구가 줄어도, 똑똑한 관리자 한 명이 예전의 열 명 몫을 해내는 시대에 연봉이 계속 오르고, 이 눈이 없는 사람은 같은 AI를 손에 쥐고도 아무 가치를 만들지 못한다.

② AI와 하나가 되어 게임하듯 몰입하는 힘

두 번째는 AI와 한 몸이 되어, 마치 게임에 빠지듯 몰입하는 능력이다. AI 도구는 본질적으로 “개인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물건이다. 그런데 날개를 달아줘도 날 줄 모르면 소용이 없다. 같은 도구를 쥐고도 어떤 사람은 평범한 결과를,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퍼포먼스를 낸다. 그 차이가 몰입이다.

이 상태에는 이미 이름이 붙어 있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flow)’ - 게이머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화면에 빠져드는 그 상태, 도전 과제와 자기 실력이 팽팽하게 맞물려 자아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험이다. 최근 개발 현장에서 유행하는 ‘바이브 코딩(vibe coding)’이라는 말도 같은 결이다. 코드를 한 줄 한 줄 짜는 게 아니라 AI에게 의도를 던지고 대화하며 흐름을 타듯 만들어내는 방식 - AI와 한 몸이 되어 리듬을 타는 작업을 가리킨다.

몰입한 사람은 AI를 ‘외부 도구’가 아니라 자기 사고의 연장처럼 쓴다. 여러 모델을 끊임없이 비교하고(“이건 중국 모델이 낫네, 저건 미국 모델이 낫네”), 한계가 보이면 다른 각도로 파고들고, 끝장 토론을 벌이며 답을 다듬는다. 게임을 깰 때 공략법을 파고들 듯, AI라는 시스템의 규칙과 강약점을 손끝으로 체득해 자기만의 플레이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몰입한 한 사람은 AI 도구 하나로 프로젝트를 시작부터 끝까지 완성해낸다. 기업이 찾는 이른바 ‘천재 AI 인재’ - 한 사람이 끝까지 책임지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 - 의 정체가 바로 이 몰입형 실행가다.

그리고 이 ‘게임하듯 몰입하는 힘’은 교육에 결정적 시사점을 준다. 몰입은 시켜서 되는 게 아니라, 재미를 느끼는 영역에서 자발적으로 빠져들 때만 일어난다. 10절에서 “아이가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파고들게 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서 다시 만난다. 억지로 시킨 공부에서는 몰입이 나오지 않고, 몰입 없이는 실행력도 자라지 않는다.

정리하면 실행능력이란, 외삽으로 떠올린 방향을 ① 실생활의 가치로 착지시키고 ② AI와 한 몸이 되어 몰입으로 완주하는 힘이다. 그리고 이 ‘완주’는 자연스럽게 다음 자질로 이어진다 -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 말이다.

8. 그 위에 얹히는 결정적 자질 - 책임감

외삽이 ‘무엇을 할지 발견하는 머리’, 실행능력이 ‘그것을 가치로 완주하는 손’이라면, 그 모두를 사람답게 묶어 주는 ‘태도’의 축은 책임감이다. 그리고 이건 AI 시대에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이유는 한 문장으로 끝난다. AI는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 회사에도 사회에도 결국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 문제에 부딪혔을 때 AI의 도움을 받든 안 받든 끝까지 풀어내려는 끈기, 납기를 맞추려는 집요함, 결과를 자기 것으로 끌어안는 자세 - 이런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이거 AI가 한 거라고 쓰지 마라.”

계산기로 문제를 풀고 “계산기가 풀었는데요?”라고 말하지 않듯, AI로 결과를 냈어도 그건 네가 한 것이다. “AI가 그렇게 말하던데요”는 답이 아니다. AI와 끝까지 토론한 뒤 “내 생각은 이것이고, 나는 이 결론에 책임진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AI가 한 건 없다. 네가 판단했고 네가 책임질 뿐이다.

함께 평가절하되었다가 다시 떠오르는 자질이 성실함이다. 초과근무를 모두 돈으로 환산하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야근은 곧 “무능의 증명”처럼 취급되어 누구도 성실함을 자랑하지 않게 됐다. 하지만 사업은 한 번에 성공하는 법이 없다. 여러 번 두드려야 열린다. 똑똑한 사람이 성실하고 책임감까지 있을 때, 비로소 “믿을 수 있다”는 신뢰가 생긴다. 그 신뢰가 결국 사람을 뽑는 마지막 이유다.

여기까지가 AI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상이다. 한 장으로 묶으면, 무엇을 만들지를 정하는 능력의 두 축(외삽·실행)그것을 얼마나 멀리 끌고 갈지를 정하는 태도의 두 축(책임·협업)이다.

AI 시대 인재상 4요소 - 능력의 축(외삽·실행)과 태도의 축(책임·협업)

9. 그래서 교육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이제 처음의 질문 -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 에 답할 차례다. 단계를 나눠서 보자.

중등교육까지는 크게 바꿀 필요가 없다

기초교육은 그대로 둬도 된다. 덧셈·뺄셈·곱셈·나눗셈도 못 하는 아이에게 AI를 쥐여줘 봤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기본 수학 능력, 기초 지식, 인성교육 - 이것들을 쌓는 기존 공교육의 틀은 어느 정도 유지되어야 한다. AI를 비판적으로 쓰려면, 먼저 비판할 토대가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

고등교육과 대학은 반드시,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문제는 여기다. 지금의 고등교육·대학교육은 정확히 “AI가 가장 잘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정해진 지식을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능력 - AI가 인간을 압도하는 바로 그 영역이다. 이걸 계속 가르치고 그 기준으로 사람을 줄 세우는 건, 계산기가 나온 뒤에도 암산 속도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 같다.

올바른 방향은 이렇게 그려진다.

  • ‘도서관’을 ‘AI’로 교체한다. 과거 대학이 도서관이라는 지식 창고 위에 세워졌듯, 이제 그 자리를 AI 도구가 채운다.
  • 그 위에서 끝장 토론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 프로젝트형·조별과제형으로, 책임지고 결과물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혼자 푸는 과업으로는 한계가 있다.

AI 도구 교육의 핵심도 분명하다. “최고의 AI 모델 하나를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모델마다 잘하는 게 다르므로, 상황에 맞게 골라 조합해 최고의 성과를 뽑아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진짜 잘 쓰는 사람은 AI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AI를 감독하고 통제하는 사람이다.

회사에 시니어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예전엔 시니어가 직접 막대한 시간을 쏟아야 했지만, 지금은 AI에 맡겨 두고 “여기서 실수했네, 정신 차려” 하고 잡아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전문지식이 없으면 AI가 실수하는지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AI 영상이 어딘가 어색한 걸 전문가는 단번에 알아채듯, 그 분야를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쟤가 이상하게 하고 있네”가 보인다. AI를 통제하려면 그 분야에서 절대적 수준에 올라야 한다.

1인 유니콘은 안 와도, 20~30명 유니콘은 온다

여기서 협업의 가치가 다시 떠오른다. 한 사람이 AI로 시작부터 끝까지 다 해내는 ‘천재형’에 대한 수요가 분명히 있지만, 개인의 전문성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1인 유니콘 기업은 생기기 어렵다. 대신 20~30명이 엄청난 퍼포먼스를 내는 유니콘은 충분히 가능하다. 과거 200~300명이 하던 일을 10~20명이 해낸다.

이때 각자는 자기가 잘 아는 영역에서 AI를 통제하고, 역할을 나눠 협업한다. “너는 이 영역에서 AI를 통제해 써라, 나는 이 영역을 맡을게.” 그리고 그 소그룹은 자기들끼리 토론하며 쌓은 지식과 정보를 잘 지켜야 경쟁력이 된다. 한 명이 이직하면 데미지가 크기에, 핵심 인재에게는 연봉이 치솟는다. 협업력·소통력·표현력이 그래서 더 중요해진다.

시험도 바뀐다

평가 방식까지 바뀔 수 있다. 예컨대 대입시험에서 AI 도구를 열어주고 문제를 준 뒤, 1박 2일 동안 그걸 활용해 풀어내게 하는 방식이다. 단순 암기나 계산이 아니라, AI를 비판적으로 부려서 실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본다. 실제 회사가 그렇게 일하니, 이렇게 뽑힌 사람이야말로 “바로 현장에 투입 가능한 실전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0. 독서 논쟁에 부치는 답 - 다독이냐 비판적 독서냐

부모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 하나로 이 원리를 검증해 보자. “책을 많이 읽히는 게 최고 아닌가요?” vs “많이 읽어도 남는 게 없으니 토론하며 표현하게 해야 한다.”

답은 곱셈으로 정리된다.

2 × 3 = 6. 어느 것이 2이고 어느 것이 3인지는 모른다. 둘이 바뀌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둘이 ‘곱하기’ 관계라는 것이다.

많이 읽는 것도 도움이 되고, 비판적으로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한쪽이 0이면 전체가 0이다. 아무리 많이 읽어도 비판 없이 글자만 따라가면 남는 게 없고(0), 아무리 비판적이어도 책을 안 읽으면 시야가 편협해진다(0).

그래서 진짜 변수는 “많이 vs 적게”가 아니라 “무엇을, 얼마나 오래, 어떻게 읽느냐”다. 핵심은 그 아이가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재미있어하는 방식으로, 비판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역사에 빠진 아이는 역사책을, 문학에 끌리는 아이는 소설을,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는 과학책을. 싫어하는 분야를 억지로 읽히면 재미도 비판도 둘 다 죽는다.

비판적 독서가 무엇인지는 실제 경험이 잘 보여준다. 과학책을 읽다 “석유가 공룡에서 나온다고? 50년밖에 안 남았다고?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되는데?”라고 의심하고, 소설을 읽다 “이 전개는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왜 갑자기 이렇게 가지?”라고 따지는 것. 역사책을 읽으며 “왜 이건 승자의 기록만 남았을까, 패자 입장은?”이라고 되묻는 것. 이렇게 복합적으로 의심하며 읽는 습관이 곧 외삽의 훈련이다.

다만 부작용도 있다. 추상적·복합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정해진 규칙 안에 갇히는 걸 답답해해서, 체스처럼 규칙 내 최적해를 빠르게 찾는 일엔 약할 수 있다. 그러나 미래 사회는 “정답지를 빨리 찾는 것”이 능사가 아닌 세상이다. 규칙을 완벽히 이해한 위에서 “이건 이렇게도 볼 수 있겠네, 이런 변수가 있겠네”를 찾아내는 사람 - 그가 대격변을 시작한다.

좋은 교육기관(튜터)의 역할도 여기서 나온다. 정해진 교과서를 들이미는 게 아니라, 아이가 어떤 책을 고르든 그 책의 난이도와 부피에 맞춰 토론하고, “이건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를 함께 파고들도록 도와주는 것. 비판적 사고는 혼자 기르기 어렵기에, 서로 듣고 표현하는 모둠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란다.

11. 한국은 이 전환을 해낼 수 있는가

방향은 그렇다 치자. 한국은 실제로 바뀔 수 있는가 - 다시 말해 4절에서 말한 ‘기근을 푸는 나라’가 될 수 있는가? 여기서 구조적 비관산업적 낙관이 갈린다.

비관 - 우리 교육은 ‘조선’을 닮았다

우리나라 교육이 쉽게 바뀌지 못하는 데는 두 개의 구조적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첫째, 교육감 직선제다. ‘교육 자치와 정치적 중립’을 내걸고 2007년 도입됐지만, 역설적으로 교육은 선거 때마다 진영 대결의 장이 됐고 공약은 무상급식·교통비 지원 같은 포퓰리즘으로 흐르기 쉬웠다. 무엇보다 개혁의 정치적 비용이 커졌다. 직선제 교육감은 주민이 직접 뽑으니 중앙정부가 톱다운으로 판을 다시 짜기 어렵고, 손대려는 순간 거대한 교직 이해집단 전체를 적으로 돌려야 한다. (직선제가 무조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 임명제가 다수인 나라도 많고 교육 자치라는 본래 명분도 있다. 문제는 그 제도가 변화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굳어졌다는 데 있다.)

둘째, 더 결정적인 자물쇠는 ‘돈’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 내국세의 20.79%가 법에 따라 자동으로 시·도 교육청에 배정된다. 수출 등으로 나라 세수가 늘면 교육 예산도 그만큼 자동으로 불어나는 구조다.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 학생 수와 무관하게 자동으로 증가한다 - 학령인구는 2005년 약 780만에서 480만으로 30% 넘게 줄었는데, 교부금은 2015년 39조에서 2026년 76조로 10여 년 만에 거의 두 배가 됐다. 둘, 이 돈이 법에 따라 유아·초·중등 교육에만 쓰도록 칸막이가 쳐져 있다. 시·도 교육청의 관할이 유치원·초·중·고까지이고 대학은 교육부 소관이라, 같은 교육인데도 교부금이 고등교육으로는 넘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은 1인당 소득 대비 초·중등 교육 투자는 OECD 최상위인데, 정작 고등교육 투자는 OECD의 68% 수준으로 하위권에 머무는 기형이 생겼다. 곳간(초·중등)엔 돈이 남아도는데 바로 옆 칸(대학·고등교육)은 말라붙는 것이다 - 4절에서 본 ‘곳간은 찼는데 굶는’ 기근의 구조가, 다름 아닌 교육 재정 안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역사가 정확한 교훈을 준다. 산업화 속도를 보면 일본이 가장 빨랐고(약 20년), 그다음이 한국, 가장 느린 것이 중국이었다. 왜 일본이 빨랐나? 분권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 호족들이 정쟁에서 이기려고 앞다투어 서양 문물을 들여왔다. 조총을, 새 기술을 먼저 갖는 쪽이 이겼으니까. 반면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 아래 “좋은 게 좋은 거지, 청나라 뒤에 있으면 안전한데 왜 깝치냐”며 변화를 거부했다. 중앙집권적이고 통합된 나라일수록 변화가 느렸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기존 문화를 통째로 부순 뒤에야 산업화에 올라탔다.

이 두 자물쇠는 사실 한 손에서 만난다. 교부금은 교육부가 자동으로 떼어 시·도 교육청에 내려보내고, 그 돈을 받아 직접 쥐고 집행하는 사람이 바로 주민이 직선으로 뽑은 교육감이다. 권력(누가 쓰느냐)도 직선제로 중앙정부를 떠나 있고, 돈(얼마가 오느냐)도 법에 따라 자동으로 내려오니, 정부가 “판을 바꾸자”고 외쳐도 당길 지렛대가 없다. 돈도 권력도 중앙의 손 밖에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한국 교육은 안타깝게도 ‘조선’ 쪽에 가깝다. ‘나눠 갖기’ 문화 위에서 돈은 줄어드는 학생을 향해 계속 흘러들고, 정작 미래를 좌우할 고등교육은 곳간 밖에서 말라간다. 중앙정부는 그 잘못을 알면서도 전체 교직 이해집단을 적으로 돌려야 하는 부담 탓에 손대지 못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기존 구조를 지키는 관성이, 오히려 변화를 시도하는 쪽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처방 - ‘일본의 하급무사’ 모델

그렇다면 길이 없는가? 역사에 처방도 있다.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것은 최상층 귀족이 아니라 하급무사들이었다. 인구가 늘며 ‘개나 소나 무사’가 된 시대, 먹고살 길 없는 하급 귀족들이 스스로 개화의 선봉에 섰다. 미국에 건너가 배워 와 무장하고, 엘리트주의를 세웠다. 개혁은 위가 아니라, 위기를 절감한 중간층에서 나온다.

교육계도 마찬가지다. 교육 일선의 사람들이 “AI 시대에 맞춰 우리가 개편을 이끌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끌어내는 길은 -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직선제를 임명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임명제로의 회귀는 다시 중앙집권, 즉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본을 빠르게 만든 힘은 중앙의 명령이 아니라 호족들 사이의 경쟁이었음을 기억하자. 답은 분권 구조는 살리되, 그 위에 경쟁의 엔진을 다는 것이다.

그 엔진의 연료가 바로 앞서 본 교부금이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의 두 자물쇠를 동시에 푸는 것이 핵심이다. ① 초·중등에만 묶인 칸막이를 헐어 고등교육과 AI 교육 개편에도 쓸 수 있게 하고, ② 학생 수와 무관하게 모두가 ‘나눠 갖는’ 자동 배분을, 잘하는 지역이 더 많이 받는 경쟁적 배분으로 바꾼다. AI 시대 교육개혁을 선도하는 지역에 교부금을 더 얹어 주고, 데이터센터·AI 기업까지 그 지역으로 유치해 혜택을 몰아준다. 그러면 지역들은 그 예산을 ‘따내기 위해’ 앞다투어 개혁에 나설 것이다 - 호족들이 서양 문물을 먼저 들여오려 경쟁했던 것과 똑같이.

실마리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2022년 정부는 ‘고등·평생교육지원 특별회계’를 신설해 이 칸막이를 일부 헐어 대학으로 재원을 돌리려 했다. 다만 교육감들의 거센 반발로 교육세 일부만(당초 3조 원에서 1.5조 원으로 깎여) 우회하는 데 그쳤고, 내국세 교부금 본체의 칸막이는 여전히 견고하다 - 앞서 본 ‘개혁 저항’이 실제로 작동한 장면이다. 그럼에도 방향은 분명하다. ‘서울대를 지방으로 옮기자’던 과거의 발상이 ‘지역에 서울대를 만들자’(지역 거점 국립대를 서울대 수준으로 키우자)로 바뀐 것도 그 한 예다. 핵심은 잘하는 곳을 끌어내리는 하향 평준화가 아니라, 경쟁을 통한 상향 - 잘하는 곳을 더 키워 나머지가 따라오게 만드는 설계다. 지금은 교육감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돌아오는 게 없으니 움직일 유인이 없다. 유인을 만들면 움직인다.

교육 개혁을 막는 두 자물쇠(직선제·교부금 칸막이)와 경쟁 배분 처방

낙관 - 한국은 ‘AI 풀스택’을 가진 몇 안 되는 나라다

비관만 있는 건 아니다. 산업 측면에서 한국의 미래는 생각보다 밝다. 현재 AI 사이클에 제대로 올라탄 나라는 미국·중국·한국, 그리고 대만 정도뿐이다. 그 외 대부분의 나라는 이 사이클의 멤버가 아니다. 중국을 빼면 공격적인 자체 모델을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유럽에 하나 있었지만 자본이 부족해 멈췄다.

한국이 유리한 건 AI 생태계의 거의 모든 조각을 갖췄다는 점이다.

  • 모델: 성능은 글로벌 선두에 1년 반 이상 뒤지지만, 자체 AI 모델이 8개가량 존재한다. (이번 정부가 ‘모두의 AI’ 같은 국민 대상 한국형 모델에 막대한 예산을 쏟고 있다 - 이른바 ‘소버린 AI’ 노선.)
  • 추론칩: 학습용 GPU는 엔비디아에 의존하지만, 추론(서빙)용 칩을 만드는 회사가 있다. 퓨리오사AI리벨리온 - 둘 다 기업가치 조 단위의 AI 반도체 유니콘이다. 여기에 엣지 컴퓨팅 칩 기업까지 더하면, 추론 칩 회사조차 없는 대부분의 나라보다 한참 앞선다.
  • 메모리: AI의 컨텍스트(한 번에 기억하는 범위)가 커지며 HBM 수요가 폭발했다. 좋은 모델을 만들려면 SK하이닉스의 HBM을 써야 한다. D램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합산 세계 약 70%, HBM은 약 80%로 세계 1위. HBM 증산을 위해 일반 D램 생산을 줄여야 해서 D램 공급 부족(쇼티지)까지 겹쳤고, 그 덕에 두 회사의 가치가 폭등했다.
  • 전력 인프라: 데이터센터 건설에 가장 많이 필요한 게 변압기·변전 설비다. 미국은 자국 변압기 제조 기반이 사실상 무너져 초고압 변압기 5~6년 치 물량이 이미 밀려 있는데, 한국은 효성중공업·HD현대일렉트릭·LS일렉트릭 같은 세계적 변압기 기업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K-전력기기 빅4’(여기에 일진전기·대한전선 등)의 수주 잔액만 33조 원대로, 미국이 18~20% 관세를 물리는데도 줄 서서 사 갈 정도다. 발전 설비 쪽도 두산에너빌리티가 원전·가스터빈·발전기를 만들 수 있어, 변전(효성·현대·LS)부터 발전(두산)까지 전력 인프라 전 계열을 한국이 갖추고 있다.
  • 에너지: 한국은 의외로 에너지 순수출국이다. 원유를 수입해 항공유·석유화학 제품으로 가공해 수출한다. 3대 정유사가 경쟁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정유 능력을 갖췄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가 세계 최고 정유국이 된 그 방식이다.)

이 마지막 조각이 결정적 통찰로 이어진다. AI는 ‘서비스 교역이 불가능하던 것’을 교역 가능하게 만든다. 과거 전기는 저장도 수출도 안 되는 ‘지역재’였다. 그런데 AI 슈퍼마켓·무인 편의점처럼 AI가 서비스를 돌리면, 그 토큰 비용(=데이터센터의 전기)이 국경을 넘어 결제된다. 즉 전기를 서비스의 형태로 수출하는 효과가 난다. 철도가 지역에서 썩던 농산물을 전국 교역재로 바꿨듯, AI가 전기에 ‘철도’를 놓은 것이다. (이 전기=국력 논리는 별도 글에서 깊이 다뤘다.)

그래서 한국은 미국 것도 중국 것도 쓰기 싫어하는 나라들에게 “자국에 맞게 학습시킬 수 있는 모델 + 인프라 + 서비스 구조”를 패키지로 팔 수 있는 중간자 위치에 있다. 원전·무기를 수출하듯, AI도 수출할 수 있다. 미국이 F-35 같은 최첨단 스텔스기를 팔아도 한국이 FA-50·천무 같은 무기를 수출하듯 - 1·2등이 못 채우는 ‘가성비 3등’의 자리를 한국이 차지할 수 있다.

물론 위험도 있다. AI 관련 시장은 지금 너무 올랐고, 거품은 한 번 무조건 꺼진다. 하지만 거품이 꺼진 뒤 살아남는 자가 독점한다. 카카오톡이 한국 시장을 지켰듯, 네이버가 “AI 검색에 노출된 블로그·카페 글 작성자에게 원고료를 주는” 방식으로 한국 시장을 방어하려 하듯, 그 독점 전쟁의 결과에 한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

맺음 - 결국 교육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결론은 1절로 되돌아온다. 교육은 언제나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장치였다. 종교의 시대엔 성직자를, 산업의 시대엔 근면한 노동자를 길러냈다.

AI의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은 이렇게 압축된다.

AI를 비판적으로 통제하고(외삽형 사고), 그 발상을 실제 가치로 만들어내며(실행능력), 그 결과를 자기 것으로 책임지고(책임감), 타인과 협업해 더 큰 것을 이뤄내는(협업력) 인간.

앞의 둘은 능력의 축이고, 뒤의 둘은 태도의 축이다. 발견하는 머리(외삽)와 해내는 손(실행)이 무엇을 만들지를 정하고, 책임지는 자세와 함께 가는 힘이 그것을 얼마나 멀리 끌고 갈지를 정한다.

그래서 부모가 할 일은 의외로 단순하다. 기초(중등까지의 IQ·인성)는 흔들림 없이 다지되, 그 위에 아이가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비판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습관, 떠올린 것을 실제로 만들어 끝까지 완주해 보는 경험, 자기 판단에 책임지는 태도, 남과 어울려 표현하고 협업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 그리고 시기가 되면 AI 도구를 마음껏 열어주고 “끌려가지 말고, 게임하듯 푹 빠져서 부려 봐라”라고 말해주는 것.

AI가 “그렇게 말하던데요”가 아니라, “AI와 끝까지 토론해 봤는데, 내 결론은 이거고, 나는 여기에 책임진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 그 한마디를 할 수 있는 아이를 길러내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미래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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