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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코딩은 정말 '코딩의 종말'일까 - 그렇게 따지면 종말은 1957년부터 이미 시작됐다

요즘 바이브코딩(자연어로 시키는 코딩)을 두고 "이제 코딩은 끝났다", "프로그래머가 필요 없어진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코드를 자동으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주는 도구는 새로운 게 아니다. 1957년 포트란의 컴파일러가 바로 그 원조다. 컴파일러란 사람이 쓴 코드를 기계가 알아서 프로그램으로 번역·생성해주는 자동화 장치이고, 그 시점부터 사람은 이미…

왜 우리는 홈플러스와 JTBC의 몰락을 꼬시다고 말하는가 - 외국 플랫폼과 상속 자본의 시대

홈플러스와 JTBC의 몰락은 단순히 사모펀드와 재벌 3세의 실패담이 아니다. 한쪽에서는 쿠팡·넷플릭스·유튜브 같은 미국계 또는 미국식 플랫폼 자본이 한국 유통과 미디어의 수익 구조를 바꿔놓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내 자본이 대중에게 더 이상 "우리 편"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국내 기업이 글로벌 플랫폼에 밀리는 장면을 보면서도 산업의…

한자를 가르치면 정말 문해력이 살아날까 - 종주국이 버리는 글자와 세계로 가는 '감정의 말'

“요즘 애들이 한자를 몰라서 문해력이 떨어졌다.” 이 말은 요즘 한국 사회에서 거의 정설처럼 돌고 있다.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고, 사자성어를 가르치면 문해력이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한자를 자기 나라 글자로 매일 쓰는 중국과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이 진단이 얼마나 위험한지 드러난다. 중국 청년의 98%...

AI는 미시시피버블인가 산업혁명인가?

"AI는 버블인가"는 틀린 질문이다. 1720년 영국과 프랑스는 같은 해, 거의 똑같은 버블(사우스시 회사와 미시시피 회사)을 동시에 겪었다. 그런데 한 나라는 그 위에서 산업혁명의 주인이 됐고, 다른 나라는 100년 트라우마 끝에 혁명으로 터졌다. 운명을 가른 것은 버블이 터졌느냐가 아니라, 터진 충격을 견딜 '견제와 신용의 제도'를 가졌느냐였다. 지금…

국채 금리 곡선은 어떻게 다음 패권국을 먼저 가리키는가 - 모양이 아니라 그 모양을 만든 신뢰를 읽어라

채권 일드 커브는 그저 만기별 금리를 이은 그래프처럼 보인다. 우상향이면 다 같은 정상이려니 싶다. 그런데 2026년 6월, 미국·한국·일본·중국·대만 다섯 나라의 국채를 같은 축에 겹쳐 놓으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모두 우상향인데, 한국은 건강해 보이고 일본은 곳간이 비기 시작했다는 경고로 읽히며, 똑같이 낮고 평탄한 중국과 대만은 정반대를 뜻한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는 왜 굶어 죽었나

프랑스혁명의 진짜 원인은 식량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유럽 최대의 인구와 군사력을 가진 부국이 무너진 것은, 곡물을 가두는 투기와 특권층을 비켜 가는 세금과 위기를 조율하지 못하는 정부가 겹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바닥에는 "절대왕정"이라는 이름과 달리 귀족 하나 통제하지 못한 권력의 허약함이 있었다. 더 불편한 사실은, 이 구조가 형태만…

프랑스혁명은 왜 왕을 죽이고도 끝나지 않았나

프랑스혁명의 비극은 로베스피에르의 광기나 공포정치의 잔혹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왕을 죽인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던 토지, 세금, 식량, 재산권의 구조였다. 혁명은 "누구를 제거할 것인가"에서 시작했지만, 실제로 근대국가를 만든 것은 "누가 무엇을 소유하고, 국가는 그것을 어떻게 기록하고 과세할 것인가"라는 시스템의 재편이었다.…

KFA는 실패했고 JFA는 정답인가 - 좋은 제도와 이기는 제도는 다르다

한국 축구가 부진할 때마다 따라붙는 결론이 있다 - KFA는 실패했으니 일본의 JFA처럼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2026년 5월, 13년을 버틴 정몽규 회장마저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면서, 이 결론은 거의 정답처럼 굳어지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이 문장이 절반만 맞다고 본다. 좋은 제도와 이기는 제도는 같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일수록 왜 더 쉽게 무너지는가

착한 사람은 왜 더 쉽게 무너질까. 이유는 덜 강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남의 말에는 의미를 붙이고, 자기 욕망에는 죄책감을 붙이고, 견디기 힘든 고생에는 참아야 한다는 이름을 붙인다. 착한 사람이 살아남으려면 더 독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욕망과 공포를 자기 편으로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

게임은 백 번을 죽어도 끝나지 않는데, 인생은 왜 한 번의 실패로 끝나는가

게이머는 보스에게 백 번을 죽어도 웃으며 백한 번째 도전을 누른다. 게임에서 죽음은 이벤트일 뿐, 끝은 플레이어가 포기하는 순간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현실에서는 실패 한 번에 주저앉는다. 무엇이 다른가. 실패의 크기가 다른 게 아니다. 실패를 받아 든 뒤의 처리가 다른 것이다. 같은 비관이 누군가에게는 걱정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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