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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가르치면 정말 문해력이 살아날까 - 종주국이 버리는 글자와 세계로 가는 '감정의 말'

“요즘 애들이 한자를 몰라서 문해력이 떨어졌다.” 이 말은 요즘 한국 사회에서 거의 정설처럼 돌고 있다.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고, 사자성어를 가르치면 문해력이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한자를 자기 나라 글자로 매일 쓰는 중국과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이 진단이 얼마나 위험한지 드러난다. 중국 청년의 98%가 한자 쓰는 법을 잊어버린 경험이 있고, 중국어문학과 교수조차 한자를 못 쓰겠다고 고백하는 시대다. 한자를 가르치면 문해력이 살아난다는 가설은, 한자를 가장 많이 쓰는 나라들이 ‘한자 기억상실증’에 집단적으로 걸려 있다는 사실 하나로 무너진다. 이 글은 세 가지 관찰을 엮어 문해력 저하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왜 한자 교육이 해법이 될 수 없는지를 차근차근 풀어 간다.

1. “한자를 가르치면 문해력이 회복된다”는 가설의 함정

청소년 문해력이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처방이 있다. 한자 교육이다. “이부자리도 모르고 족보를 족발보쌈 세트로 안다”는 한탄과 함께, 교과서에 한자를 다시 병기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실제로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는 57년 만에 다시 공론장에 올라와 있고, 찬성 여론도 80%를 넘길 만큼 높다.

논리는 단순하다. 우리말 어휘의 상당수가 한자어이니, 한자를 알면 단어 뜻이 보이고, 단어를 알면 문장이 읽힌다는 것이다. 그럴듯하다. 그런데 이 진단은 결정적인 지점에서 어긋난다.

가설이 맞으려면 한자를 많이 쓰는 나라일수록 문해력이 높아야 한다. 그런데 정반대다.

단어를 모르는 것과 문해력이 낮은 것은 다르다

어떤 사람이 ‘차선책’이라는 단어를 모른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아, second plan 같은 거?” 하고 그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면, 그는 개념이 없는 게 아니다. 그저 그 단어를 안 쓸 뿐이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말할 때, 그것이 ‘내가 아는 단어를 그가 모르는 것’인지 ‘그가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아이들이 사자성어를 쓸 때도 사실은 한자의 뜻을 알아서가 아니다. 어떤 분위기에서 그 말이 쓰이는지를 기억해 관용적으로 꺼내 쓰는 것이다. 그러니 “한자를 모른다”가 곧 “문해력이 낮다”가 되지는 않는다.

2. 한자 종주국은 이미 한자를 잊고 있다

“그래도 한자를 쓰는 나라는 사정이 낫지 않냐”고 물을 수 있다. 한자는 뜻을 담은 표의문자이니, 글자만 봐도 의미가 통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다.

한자를 자기 나라 글자로 쓰는 중국에서, 청년 2,500명 중 약 98%가 “한자 쓰는 법을 잊어버린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베이징사범대 중문과 교수조차 흔한 한자를 쓰다 점 두 개를 빼먹었다고 고백한다. 읽을 수는 있지만 쓰지는 못하는 이른바 ‘한자 기억상실증’이, 한국을 제외한 동아시아를 덮치고 있다.

원인은 명확하다. 중국인들은 스마트폰으로 글을 쓸 때 영어 발음을 입력한 뒤 한자를 고르는 방식을 쓴다. 발음을 치면 한자가 주르르 뜨고, 그중 하나를 택하면 끝이다. 손으로 한자를 쓸 일이 완전히 사라졌다. 한자는 5만 개가 넘고, 교육받은 사람도 6천~8천 개를 알아야 하는데, 그 많은 획수와 부수를 매일 보기만 하고 쓰지는 않으니, 읽을 줄은 알아도 쓸 줄은 모르는 세대가 된 것이다.

일본도 똑같다. 일본인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손으로 쓰라면 한자를 기억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일본 역시 히라가나로 발음을 적고 추천 한자를 고르는 자동 변환 방식이라, 구조가 중국과 동일하다.

결론은 하나다. 한자를 가장 많이 쓰는 동아시아 3개국이 공통으로 ‘한자 기억상실증’에 시달리고 있다. 한자를 쓰든 안 쓰든, 읽기·쓰기 매체가 스마트폰과 영상으로 바뀐 시대에는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한자를 가르치면 문해력이 회복된다는 가설은, 한자를 매일 쓰는 나라들이 더 심각한 증상을 보인다는 사실로 정면 반박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한자라는 글자 체계는, 그 종주국에서조차 디지털 시대에 손에서 놓이고 있다. 한자를 써도 긴 문장을 못 읽는 문해력 논란은 중국에도 똑같이 있다. “한자를 알아야 문해력이 산다”는 전제는 이렇게 실증적으로 무너진다. 이미 폐기되고 있고 종주국에서도 안 쓰는 글자를, 우리 아이들에게 강제로 외우게 하는 일이 과연 미래를 위한 투자일까.

글자가 아니라 매체가 바뀌었다 - 문해력 저하의 구조적 원인

그렇다면 왜 중국·일본·한국이 동시에 같은 문제를 겪는가. 답은 문자 체계가 아니라 ‘읽고 쓰는 매체’가 통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신문을 안 읽고, 책을 안 읽고, 영상으로 정보를 흡수한다. 영상은 정보가 계속 흘러간다. 시청자가 스스로 멈춰 생각하지 않으면 내용을 깊이 처리하기 어렵다. 영상을 보는 동안 뇌는 입력만 받을 뿐, 멈춰 이해하고 정리하는 ‘사유’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

이게 문해력 저하의 진짜 구조다. 한자어를 모르는 게 아니라, 글을 읽으면서 멈춰 생각하는 습관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교육자 최은영의 진단도 같다. “아이들이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려 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문해력이 떨어진다.” 한자를 더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읽기와 보기의 과정에서 멈추고 사유하는 훈련이 빠진 게 핵심이다.

중국의 한자 기억상실증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손으로 쓰지 않으니 획이 기억나지 않는다. 읽기만 하고 쓰지 않으니, 보는 것과 쓰는 것이 분리된다. 한국의 청소년이 ‘이부자리’를 모르는 것도 한자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단어가 등장하는 긴 글(신문, 책)을 읽을 기회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영상 매체 보급이 긴 글 읽기 감소와 손으로 쓰기 소멸을 거쳐 한자 기억상실증과 문해력 저하라는 공통 결과로 이어지는 흐름도

즉 한자 교육 강화라는 해법은 증상 하나를 보고 원인을 잘못 짚은 것이다. 기침이 나는데 기침약만 먹는 격이다. 중국인이 한자를 쓰면서도 한자를 잊어가는 현상은, 문자 체계가 아니라 매체 환경이 원인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4. 한자가 우월하다는 착각 - 한국어의 진짜 힘은 ‘감정 해상도’에 있다

한자 교육 강화론의 밑바닥에는 ‘한자가 한글보다 우월한 문자’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한자어를 많이 알아야 글을 깊이 이해하고, 사자성어를 알아야 교양 있는 표현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 전제도 사실과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 답답하다: 몸이 답답할 수도 있고, 마음이 답답할 수도 있고, 상황이 답답할 수도 있고, 사람이 답답할 수도 있다. 영어로는 frustrating, suffocating 등 여러 단어를 상황마다 골라 써야 하고, 그래도 가슴이 꽉 막힌 느낌이 다 전달되지 않는다.
  • 억울하다: 불공평하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잘못이 없는데 사람들이 나를 잘못 보고, 해명하고 싶은데 아무도 안 들어주고, 속에서 열불이 나는 그 느낌이다. 영어의 unfair나 misunderstood와는 질이 다르다.
  • 섭섭하다: 화난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고, 실망한 것도 아닌데 그 세 가지가 다 섞였다. 친구가 내 생일을 잊었을 때, 애인이 답장을 늦게 했을 때, 가족이 내 마음을 몰라줄 때. 영어로는 “I’m not mad, but I feel a little hurt and disappointed because I expected more from you”라고 한 문장이 아니라 사연 하나를 풀어야 한다.
  • 정떨어진다: ‘사랑이 식었다’보다 무서운 관계 사망 선고다. 연애뿐 아니라 친구, 가족, 브랜드, 연예인에게까지 쓸 수 있다.
  • 미운정: 싫은데 막상 없어지면 허전하고, 매일 욕했는데 안 보이면 생각나는 사람. 영어로 번역하면 “I hate you, but I’m attached to you”가 되는데, 이건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처럼 들린다.

처음에는 “아이고”, “어머”, “괜찮아” 같은 감탄사였다. 하나의 말이 맥락에 따라 위로도 되고 거절도 되고 놀람도 되는, 그 풍부함에 외국인들이 매료됐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더 깊은 말들이다. “애매하다”, “수고했어”, “억울해”, “섭섭해” — 영어로는 한 단어로 옮길 수 없어 문장 하나를 통째로 풀어야 하는 감정의 어휘들이다.

이 단어들은 한자 지식과 아무 상관이 없다. 마음을 정확히 찍어내기 때문에, 영어에 마땅한 대응어가 없는 사람들이 그냥 가져다 쓰기 시작한 것이다. 어려운 글자가 아니라 마음에 닿는 표현이라서 국경을 넘는다.

한자 우월론은 이 사실을 외면한다. 한자어를 많이 안다고 해서 감정을 더 정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한자 교육 강화는 그 고유어를 더 죽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한자어를 대량 차용하면서 이미 고유어가 많이 사라졌고, 동음이의어가 비정상적으로 많아져 언어 혼란만 가중됐다. 중국에서 조차도 쓰지 않는 과거의 한자를 더 끌어들이는 건 한국어의 진짜 강점을 깎아먹는 일이다.

최소한 사실 한글이 없던 삼국시대, 고려시대는 지방의 방언보다 당시 세계적(중화)으로 더 사용가능한 한자를 많이 알고 있는 게 맞다. 그런데 오늘날 글로벌 시대에 중국인조차 안쓰는 고대 한자어를 쓰는 게 과연 옳은가?

5. ‘차선책’을 모른다고 문해력이 낮은가 - 진단을 바로잡아야 해법도 보인다

문해력 논쟁에서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이 이 지점이다. 어떤 단어를 모른다고 해서 곧 문해력이 낮은 것은 아니다.

앞서 ‘차선책’을 모른다고 문해력이 낮은 건 아니라고 했다.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더하면 진단은 더 분명해진다. ‘차선책(次善策)’은 한국과 일본(じぜんさく)에서 쓰이는 한자어일 뿐, 정작 한자 종주국인 중국의 현대 일상어로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 중국인에게 ‘차선책’이라고 해봤자 잘 안 통하고, 같은 뜻으로는 备选方案(bèi xuǎn fāng àn, 비선택안)을 주로 쓴다. 한자어라고 해서 한자문화권 전체에서 통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문제의 본질은 특정 한자어를 아느냐가 아니라, 그 개념을 이해하고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느냐다. ‘차선책’을 몰라도 ‘second plan’으로 이해하면 된다. 누군가 ‘참나’라는 감탄사를 안 써도, 그 어이없는 감정을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 문해력이 낮다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진단이 갈린다.

  • 잘못된 진단: “한자어를 몰라서 문해력이 떨어졌다” → 한자 교육 강화
  • 올바른 진단: “개념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 사유와 출력 훈련

진단을 잘못하면 해법이 정반대로 간다. 한자 암기는 증상 하나를 보고 원인을 잘못 짚은 처방이다. 중국인이 한자를 매일 쓰면서도 한자를 잊어가는 현상, 미국인이 영어에 없는 한국어 감정 단어에 열광하는 현상 - 이 두 사실은 모두 “문해력의 핵심은 한자 지식이 아니다”를 가리킨다.

한자 교육 강제가 만드는 갈라파고스 - 번역어 고집의 대가

한자 교육을 강제하려는 흐름에는 또 하나의 위험이 있다. 한국이 이미 저지른 ‘인위적 번역어 고집’의 실패를 되풀이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사회·역사 용어와 과학·기술 용어 양쪽에서 똑같이 벌어진다. 먼저 사회·역사 쪽을 보자. 한국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고유명사를 굳이 한국식으로 번역해 가르쳤다.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를 ‘대헌장’으로, ‘시진핑(Xi Jinping)’을 한자 독음 ‘습근평’으로 부르는 식이다. 국내 시험에서는 ‘대헌장’으로 외워야 하지만, 정작 해외 어디서도 ‘Daeheonjang’은 통하지 않는다. (폐쇄적인 중국이 아직도 습근평이라고 부르고 시진핑은 이 말을 알아 들을 수도 없다.)

과학·기술 용어로 가면 혼란이 더 노골적이다. 대표적인 게 화학 주기율표의 원소 이름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나트륨(Natrium)’ ‘칼륨(Kalium)’ 같은 독일어 계열 이름을 써 왔다. 초기 화학 교육이 독일·일본을 거쳐 들어온 흔적이다. 그런데 국제 표준(IUPAC, 영어)은 ‘소듐(sodium)’ ‘포타슘(potassium)’이다. 글자만 봐서는 같은 원소라는 걸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이름이 완전히 다르다. 대한화학회가 2005년에 영어식 명칭으로 개정하면서 교과서는 소듐·포타슘·아이오딘으로 바뀌었지만, 의학·산업 현장과 어른 세대는 여전히 나트륨·칼륨·요오드를 쓴다. 그래서 한 학생이 학교에서는 ‘소듐’을 배우고, 병원 검사지에서는 ‘나트륨’을 보고, 시험에서는 둘 다 알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원소 하나를 두고 독일식·영어식 이름이 뒤섞여, 표준이 독일 것이었다가 미국 것이었다가 오락가락한 역사가 그대로 학생의 부담으로 남은 것이다.

원자번호 11번 Na를 한국식 '나트륨'에서 국제표준 '소듐'으로 바꿔 표기한 원소 이름 카드 같은 원소 Na 하나를, 한국 교과서는 독일식으로 ‘나트륨(Natrium)’, 국제표준(IUPAC)은 영어식으로 ‘소듐(sodium)’이라 부른다. K도 한쪽은 ‘칼륨(Kalium)’, 다른 쪽은 ‘포타슘(potassium)’이다. 글자만 봐서는 같은 물질인지 짐작조차 어렵다. (이미지: 지학사)

이런 로컬라이징은 국내 시험에서는 통하지만, 해외로 나가면 다시 원래 명칭을 배워야 하는 이중 학습 부담을 만든다. 학생은 국내에서 ‘대헌장’과 ‘나트륨’으로 외우고, 해외에 나가면 ‘Magna Carta’와 ‘sodium’을 다시 배워야 한다. 한국 공교육을 세계적 흐름에서 단절시키는 이른바 ‘갈라파고스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한자 교육 강제는 이러한 갈라파고스 현상을 더 깊게 만든다. 중국에서도 일상적으로 안 쓰는 고대 한자를 한국 학생에게 강요하는 건, 이집트인에게 고대 상형문자를 모른다고 비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과거에 쓰이던 한자어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떠받들고, 그것을 모르는 세대를 ‘문해력 부족’으로 낙인찍는 것은 진단을 빙자한 세대 간 권력 행사에 가깝다. (교육은 내가 아는 지식을 후대에게 전파하는 게 아니라 지금 유용한 글로벌 표준 지식을 빠르게 전파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 억지로 사자성어를 암기시키는 건 불필요한 낭비다. 반면 요즘 세대가 쓰는 줄임말이나 신조어를 ‘저급하다’고 일축하는 것도 같은 오류의 다른 면이다. 그 표현이 왜 필요한지, 무슨 감정을 담고자 했는지를 먼저 들어야 한다. 억지로 가르치려는 순간, 배우는 쪽은 자기가 성장할 기회를 잃는다.

살아남는 것은 권위가 아니라 공감이다

세 가지 현상은 하나의 결론으로 모인다.

진짜 똑똑한 표현은 어려운 단어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단어를 고르는 것이다. “이런 한자어도 모르냐”고 면박을 주는 태도는 공감하려는 게 아니라, 상대가 틀렸다고 깔고 시작하는 것에 가깝다. 표현력은 쌓아 올린 학식이 아니라 삶의 깊이와 사유에서 나온다.

그래서 가치 있는 말은 억지로 강요하지 않아도 살아남는다. 한국의 감정어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미국 일상으로 스며든 것이 그 증거다. 거꾸로 권위로 붙잡아두려는 것 — 한자 강제 교육이든, 종주국의 받아쓰기 대회든 — 은 도태를 막지 못한다. 언어를 살리는 것은 강제된 권위 있는 문자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표현이다.

흥미롭게도 이 흐름은 양방향이다. “더 넓게 통하는 표현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말은 영어를 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 고유어가 영어권으로 역수출되는 현상으로도 나타난다. 영어권이 거꾸로 “애매하다”를 자기 어휘에 넣는 장면이 그렇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느 언어가 우월하냐가 아니라, 더 정확히 찍어내고 더 넓게 통하는 표현이 국경을 넘어 이동한다는 사실이다.

6. 그럼 진짜 해법은 무엇인가 - 멈춰 생각하고 출력하는 습관

한자 교육이 해법이 아니라면, 문해력을 살리는 진짜 방법은 무엇인가. 핵심은 ‘읽기·보기의 과정에서 멈추고 생각하며, 이해한 내용을 말하기·쓰기·그리기로 표현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동영상을 보더라도 그냥 흘려 보내면 안 된다. 구간마다 끊고,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인물 관계도를 그리거나 자기 언어로 정리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왜 이 장면이 재밌었을까?” “이 인물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영상이 지나간 게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과 느낌에 대해 생각하려는 태도가 핵심이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는 것보다, 읽고 생각하게 하는 게 더 낫다. 도화지를 한 장 주고 “인물 관계도를 그려 보자” “이 장면을 네 말로 설명해 보자” 하는 것이 한자 100자 암기보다 문해력에 훨씬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입력(읽기)과 출력(쓰기·말하기)을 연결하는 것이다. 읽기만 하고 끝내면 정보가 머릿속을 통과만 한다. 읽고 멈춰 생각하고, 그 생각을 자기 언어로 표현해야 비로소 사유가 일어나고 문해력이 자란다. 교육자 최은영의 방식도 같다. 학생이 이해될 때까지 끊어 읽고, 이해한 내용을 말이나 글로 출력하도록 돕는 것. 이게 한자 암기보다 훨씬 본질적인 문해력 교육이다.

정보 입력 후 멈춰 사유하면 출력을 거쳐 문해력이 향상되고, 사유하지 않으면 통과만 하고 끝나 문해력이 저하된다는 분기 흐름도

읽기와 쓰기는 다른 기계다 - 독서량이 곧 표현력은 아니다

문해력 논쟁에서 자주 혼동되는 또 하나가 ‘읽기’와 ‘쓰기’를 같은 것으로 보는 착각이다.

읽기는 입력이고, 쓰기는 출력이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기제로 작동한다. 많이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사실 독서량과 표현력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낭만어부라는 어부 시인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사람이, 시인이 되고 싶었던 어부가, 인터뷰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고도화된 어법의 시를 읊었다. 그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아니다. 평생 바다에서 살며 쌓은 경험과 감정, 그리고 그 순간을 사유한 흔적이 그대로 언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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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독서량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독특한 경험, 그 경험에서 비롯된 고통과 감정, 그리고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기록하려는 태도에서 나온다. 오히려 많이 읽기만 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확증 편향에 빠져 새로운 게 안 떠오르는 역설도 생긴다. 음악 작곡가가 곡을 많이 듣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예전 멜로디를 표절하면서 ‘내가 쓴 곡’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독서량은 이러한 경험이 부족할 때 매울 수 있는 재료일 뿐이다.)

진정한 표현력은 유식한 단어를 많이 나열하는 능력이 아니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며,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선택하는 능력이다.

7. 그렇다면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물론 현실의 무게는 무시할 수 없다. 사회·역사 교과서엔 한자어 용어가 빼곡하고, 그 단어를 아는 학생이 시험에서 유리한 구조는 분명히 존재한다. 당장 입시를 치르는 아이에게 “한자는 도태된 글자야”라는 말은 공허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유리함의 정체를 정확히 봐야 한다. 그것은 ‘한자를 안 것’의 결과가 아니라 ‘책을 읽고 개념을 이해한 것’의 결과다. 그렇다면 처방도 한자 암기가 아니어야 한다.

영상을 봐도 구간마다 끊고 “왜 이게 재밌었지?”를 물어보는 것, 이해한 내용을 자기 말로 설명하게 하는 것, 도화지에 인물 관계도를 그려보게 하는 것 — 멈춰 생각하고 자기 언어로 출력하는 훈련. 읽기와 쓰기는 다른 능력이고, 진짜 길러야 할 것은 글자의 양이 아니라 생각의 깊이다.

한자를 더 넣는다고 문해력이 살아나지는 않는다. 종주국도 버리는 글자를 붙잡는 대신, 멈춰 생각하고 마음에 닿게 표현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 — 그것이 흘러가는 시대에 언어를 살리는 길이다.

당신은 문해력이라는 이름에 숨어서 ‘피에스타’(축제), ‘라비앙 로즈’(장비및 인생) 라는 뜻을 아는 MZ들에게 침대 생활을 하는 오늘날 ‘이부자리’를 모른다고 면박을 주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오히려 공교육이 1970년대 버전에서 업데이트 되지 못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진단을 바로잡아야 해법이 보인다

문해력 저하의 원인을 ‘한자 몰라서’로 진단하면 해법이 한자 교육 강제가 된다. 하지만 실제 원인은 정보를 소비만 하고 멈춰 사유하지 않는 습관이다. 잘못된 진단이 과거로의 회귀를 정당화한다.

중국이 한자를 매일 쓰면서도 한자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는 사실은, 한자 병기가 문해력 회복의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동시에 한국어가 영어에 없는 감정 단어로 미국에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자 우월론이 근거 없는 전제임을 보여준다.

문해력(Literacy)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소리 내어 읽는 능력을 넘어, 글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맥락을 이해하며, 습득한 정보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일상생활 및 문제 해결에 활용하는 능력을 의미 한다고 정의되 있다.

진정한 문해력을 안다면 한자 암기가 아니라, 읽고 보는 과정에서 멈춰 생각하고, 그 생각을 말하기·쓰기·그리기로 출력하는 사유의 습관이 진짜 해법이다. 그리고 한국어가 가진 고유의 감정 해상도를 자각하고, 글로벌 표준을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꼭 한자 교육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중국에서 실제로 쓰는 한자어를 사용하는 게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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