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과 학점은행제는 왜 둘 다 AI를 못 가르치는가
3분짜리 영상 하나를 보았다. 대통령이 "딴 얘기 하지 마시고"라며 기관장의 말을 끊는 장면이다. 댓글은 둘로 갈렸다. 무능한 관료를 통쾌하게 혼냈다는 쪽과, 예산 없어 죽겠다는 사람을 몰아세웠다는 쪽. 그런데 그 자리의 두 사람은 **둘 다 맞는 말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같은 회의의 앞부분이다. 거기서 대통령은 오지선다 수능을 두고 거의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성인에게는 학위만, 아이에게는 등급만 실어 나르는 두 배관은 **정반대 방향으로 같은 병에 걸려 있었고**, 그래서 12년과 32년 동안 아무도 잘못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날 3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2026년 8월 5일 청와대 영빈관, 교육부 업무보고 자리였다. 아래가 그 장면이다.
대통령이 먼저 판을 깔았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생산 수단을 가져야 하는데, 지금 인공지능이라는 이전에 보지 못한 생산 도구가 생겼으니 이걸 모든 국민에게 쥐어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물었다. 교육당국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교육부 장관이 답했다. AI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어떤 유리함이 있는지,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같은 기본이 먼저 되어야 하고, 학생들이 창의력 같은 기본 역량을 갖춘 후에 활용 능력을 더해 주는 것이 방향이라고. 그리고 AI 3강을 위한 영재와 전문 인력은 별도로 나누어 추진하고 있다고.
대통령이 다시 물었다. 학교에서 지금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어떻게 가르칠 계획인지. 답은 시범학교를 운영 중이고 내년에 훨씬 더 많이 늘리겠다는 것이었다. 초등 기초 단계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는 아직 확정하기 위한 준비 중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화제를 옮겼다. 학교는 그렇다 치고, 일반 시민들에게는 어떤 교육 기회를 제공할 계획이냐고.
여기서 국가평생교육진흥원장이 답했다. AI가 의식주에도 붙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세상이 왔고, 옛날에 배운 사람들이 지금 활용하지 못해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래서 내년부터 학점은행과 독학사 과목에 AI를 기본 교양 과목으로 넣겠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 기관이 2008년 설립되고 18년 되는데 예산이 단 한 번도 늘어난 적이 없고, 오히려 3년 전보다 60% 줄었다고. 대상 인구는 급증하는데 예산은 줄었다고. 교육부라든가 기재부라든가…
대통령이 끊었다.
“자 그 딴 얘기하지 마시고,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느냐 이 말이에요. 어떻게, 누구를 대상으로.”
기관장이 다시 답했다. 400개 학점운영 기관이 있고, 거기에 AI 기초 소양과 AI 윤리 같은 가장 기초적인 과목부터 내년에 실시하겠다고. 대학 평생교육원도 활용하겠다고.
대통령은 마지막에 컴퓨터 학원 이야기를 꺼냈다. 컴퓨터 시대가 열리자 온 동네에 학원이 난립하다시피 했고, 아이 어른 가릴 것 없이 배우러 갔고, 일상화되면서 다 사라지기도 했지만 그게 대한민국 디지털화에 크게 도움이 됐을 거라고. 그런 것처럼 AI도 어떻게든 조성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 장면이 이해가 안 되는 이유
영상만 보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대통령은 왜 저렇게 답답해하고, 기관장은 왜 억울한 표정인가.
기관장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만하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예산은 실제로 줄었고, AI 과목을 넣겠다는 것도 진짜 계획이며, 400개 기관은 실재한다. 자기가 가진 카드를 다 꺼냈다.
대통령 입장에서도 틀린 게 없다. 그는 국민이 AI를 쓰게 만들 방법을 물었는데 돌아온 건 예산 사정과 과목 편성이었다.
둘 다 맞는 말을 하는데 대화가 안 되는 상황. 이럴 때 사람들은 보통 누가 나쁜 놈인지를 찾는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나쁜 놈이 없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어긋남의 정체를 보려면 두 사람이 각각 무엇을 쥐고 있었는지 봐야 한다.
대통령이 쓴 단어는 ‘생산수단’이었다
대통령은 AI를 과목이라 부르지 않았다. 생산 수단이라고 불렀고, 이어진 동사는 “가르친다”가 아니라 “쥐어 드려야 한다”였다.
이건 교육 용어가 아니라 소유와 배분의 용어다. 그가 물은 것은 커리큘럼이 아니라 유통망이었다. 누구에게, 어떤 경로로, 얼마나 빨리 닿느냐.
마지막에 컴퓨터 학원을 꺼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에서 전 국민이 새로운 도구를 실제로 익힌 사건은 사실상 한 번뿐이고 그게 컴퓨터인데, 그 확산에는 국가 학위도, 학점 인정도, 인증기관도 없었다. 배우면 취업이 되고 돈이 되니까 학원이 생겼고, 다들 쓸 줄 알게 되자 조용히 사라졌다.
대통령이 “일상화되면서 다 사라지기도 했지만”까지 굳이 붙인 게 핵심이다. 사라질 수 있었다는 건 그 학원들이 제도에 기대지 않고 수요에만 기대 있었다는 뜻이다. 그가 원한 모델은 이것이었다.
기관장이 쥐고 있던 것은 정반대 물건이었다
문제는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가진 카드가 그 모델과 정확히 반대라는 점이다.
우선 이 기관은 강의를 하지 않는다. 민간 기관이 개설한 과목을 심사해 학점으로 인정해 주는 인증기관이다. 그가 말한 “400개 학점운영 기관”의 실체는 학점은행제 공식 통계 기준 407개이고, 구성은 이렇다.
| 유형 | 기관 수 |
|---|---|
| 대학·전문대 부설 평생교육원 | 172 |
| 원격평생교육시설 | 97 |
| 직업훈련기관 | 57 |
| 정부관련기관 | 37 |
| 학원(기술·사회·예능계) | 9 |
| K-MOOC | 9 |
| 합계 | 407 |
절반 이상이 수강료로 먹고사는 민간 사업자다. 특히 97개 원격평생교육시설은 ‘○○사이버평생교육원’ 같은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업 구조는 온라인 학원 그 자체이고, 홈페이지 대문에 걸린 상품은 대부분 사회복지사 2급과 보육교사다.
그러니 “학점은행과 독학사에 AI를 기본 교양 과목으로 넣겠다”는 말을 정확히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407개 민간 사업자에게 ‘AI 기초 소양’ 과목 코드를 열어주겠다.
국가가 국민을 AI로 교육하는 게 아니라, 학원이 그 과목을 팔 수 있도록 허가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과목을 사는 사람은 AI를 배우러 온 사람이 아니다. 사회복지사 학위 요건을 채우러 온 사람이다.
대통령이 “누구를 대상으로”를 굳이 덧붙인 게 이 지점을 겨눈 것으로 보인다.
이 제도의 화폐 단위는 처음부터 ‘학위’였다
왜 이렇게 됐는지는 제도의 출생을 봐야 한다.
학점은행제는 1995년 5·31 교육개혁에서 나왔다. ‘열린교육사회·평생학습사회 기반 구축’이라는 항목 아래 학점은행제, 최소 전공인정학점제, 원격교육 지원체제가 함께 묶여 발제됐고, 1997년 1월 ‘학점인정 등에 관한 법률’로 제정되어 그해 3월 시행됐다.
당시의 시대 문제는 학력이었다. 대학에 못 간 사람, 중퇴한 사람에게 학위 취득 경로를 열어주자는 것. 명문대 서열과 대졸 학력이 인생을 가르던 사회에서, 국가가 뒷문을 하나 만들어 준 셈이다.
그래서 이 제도의 화폐 단위는 처음부터 학위였다. 능력을 기르는 제도가 아니라 학력을 사후에 보정해 주는 제도로 설계된 것이다. 교육은 학위를 발급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절차였다.
30년이 지났다. 대학 진학률이 70%를 넘긴 사회에서 ‘학위 없는 사람에게 학위를’은 더 이상 국가적 병목이 아니다. 그런데 제도는 그 목적 그대로 남아 있고, 지금은 학위 자체가 아니라 학위를 요구하는 자격증을 향해 돌아간다. 사회복지사 2급은 연간 7만 건 넘게 발급되어 다른 어떤 자격증과도 비교가 안 되는 규모다.
교육이 빠지고 거래만 남은 삼각형
여기서 이 글의 핵심이다. 이 구조에서는 학습의 질을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세 주체의 이해가 전부 같은 방향이다. 느슨할수록 모두에게 이득이다. 어느 쪽도 악의가 없는데, 각자 합리적으로 행동하면 교육의 질을 요구할 사람이 구조 안에서 사라진다.
그 결과는 예측 가능하다. 2025년 11월 경향신문 취재가 확인한 것은 이렇다.
- ‘플래너’라 불리는 브로커가 58만 명 규모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며 특정 교육기관으로 수강생을 몰아주고 수수료를 챙긴다
- 이들이 운영하는 ‘학습지원센터’에 9개 교육기관의 중간·기말·퀴즈 족보가 게시돼 있었고, “다른 노트북에서 자료 열기”, “Ctrl+F로 검색”, “시험 25분 후 제출” 같은 부정행위 매뉴얼까지 제공됐다
- “교육원·국평원에 적발되면 안 되니 자료를 띄워놓지 말라”는 감시 회피 지침도 있었다
- 지인의 공동인증서로 본인인증을 통과해 10분 만에 대리시험을 끝낸 사례도 나왔다. 웹캠 감시도, 대면 시험도 없다
- 국평원 입장은 “부정행위 지원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였다
마지막 항목이 중요하다. 이건 변명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다. 인증기관은 원래 강의실 안을 볼 위치에 있지 않다. 서류를 심사할 뿐이다. 구조가 그렇게 짜여 있다.
국가가 이 제도에 손을 아예 안 댄 것도 아니다. 2019년 사회복지사업법 시행규칙이 개정되면서 2020년부터 사회복지 현장실습이 160시간으로 늘고 실습기관과 실습지도자 요건도 법으로 못 박혔다. 다만 손댈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라. 시간과 기관 자격, 즉 세거나 서류로 확인할 수 있는 것뿐이다. 이론 과목은 여전히 온라인으로 채워지고, 그 강의실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그때도 지금도 아무도 보지 않는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2014년 국정감사에서 이미 “학점은행제 운영기관과 사후관리 기관 사이에 유착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 나왔다. 12년째 같은 자리다. 2025년 2월 교육부 종합감사에서는 국평원 자체가 대상이 되어 독학학위제 운영·관리 소홀 등으로 기관경고를 받았다.
AI는 이 배관을 통과할 수 없다
이제 왜 그날 대화가 어긋났는지가 보인다.
AI 역량은 학위로 증명되지 않는다. 쓸 줄 아느냐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학점은행제는 학위로만 값을 매기는 제도다. 여기에 AI를 넣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
- AI 과목은 다른 목적으로 온 사람이 끼워 듣는 교양 한 칸이 된다
- 그 과목은 위의 삼각형을 그대로 통과한다. 온라인 이수 체크, 족보, 25분 후 제출
- AI를 못 쓰는 사람이 AI 학점을 가진 사람이 된다
- 평가인정은 과목 단위 심사라 갱신이 느리다. 모델이 반년마다 뒤집히는 분야를 다루기엔 태생적으로 굼뜨다
숫자로는 성과가 잡힌다. 수만 명이 AI 교양을 이수한 것으로 집계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물은 것은 그 숫자가 아니었다.
가해자가 없다
정리하면 이 장면에는 잘못한 사람이 없다.
- 대통령은 국민에게 새 도구를 쥐어줄 방법을 물었다. 정당한 질문이다
- 기관장은 자기가 가진 권한과 예산 안에서 가능한 최선을 답했다. 정직한 답이다
- 407개 교육기관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한다. 합법이다
- 학습자는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최단 경로로 딴다. 합리적이다
- 국평원은 법이 정한 심사 업무를 한다. 규정대로다
각자 다 옳은데 합쳐 놓으면 교육은 없고 거래만 남는다. 이게 이 장면이 유독 답답하고, 보는 사람이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지는 이유다. 서로가 피해자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를 만든 것은 사람이 아니라 30년 전의 문제 설정이다. ‘모두에게 대학 학위를’이라는 목표는 그 시대엔 진보적이었다. 지금은 그 목표가 화석이 되어, 국가가 성인에게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배관을 학위 전용 파이프로 고정시켜 놓았다.
그런데 마땅히 어떻게 할 수도 없다
대통령이 답답해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는 이 제도를 손대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데 있다.
- 법정 제도다. 학점인정법과 평생교육법을 고쳐야 하고, 학위와 직결되므로 소급 문제가 생긴다
- 누적 113만 명이 이미 이 경로로 학위를 받았고, 발급량은 지금도 늘고 있다. 2023년 7만 1378명, 2024년 7만 1688명, 2025년 7만 8222명으로, 학령인구가 줄어드는 와중에 오히려 증가했다. 제도를 부실하다고 규정하는 순간 그 학위들의 값이 흔들린다
- 무엇보다 복지 인력 공급망이 여기에 물려 있다. 사회복지사와 보육교사 상당수가 이 통로로 나온다. 기준을 조이면 요양원과 어린이집 현장의 인력 수급이 바로 막힌다. 저출생·고령화 대응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 407개 기관은 이미 하나의 산업이다. 인정 기준을 높이면 그만큼의 반발이 온다
문제를 알아도 칼을 대면 다른 데가 터진다. 12년 동안 국정감사에서 같은 지적이 반복되고도 그대로인 것은 무능해서가 아니라 누구도 이 매듭을 자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컴퓨터 학원 이야기는 개혁 주문이 아니라 우회 선언이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그 발언의 성격이 달라진다.
대통령은 “학점은행제를 고쳐서 AI를 가르쳐라”라고 말하지 않았다. 제도 이야기를 내려놓고 컴퓨터 학원으로 넘어갔다. 그건 주문이 아니라 우회로 선언에 가깝다.
- 인증 채널로 AI를 배분하면 대상이 자격증 수요자로 한정되고, 학점으로 환산되는 순간 활용과 무관해진다
- 컴퓨터 때처럼 쓸 줄 알아야 이득이 되는 환경을 만들면 국가가 인증하지 않아도 시장이 알아서 퍼뜨린다
- 그리고 일상화되면 스스로 사라지므로 예산이 영구히 묶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는 곧바로 시험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컴퓨터 학원 이야기는 그날의 마지막 발언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곧바로 이렇게 말하며 화제를 되돌린다.
“그 아까 시험 얘기 잠깐만 더 하면”
같은 회의의 앞부분에서 그는 이미 오지선다 객관식 수능을 정면으로 비판한 뒤였다. 아이들을 규격화한다, 초보 컴퓨터가 되는 연습을 시키고 있다, 어른들이 편하게 채점하고 분류하고 행정을 의심받지 않고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희생시킨다. 되돌아와서는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수시는 이미 학생부와 면접으로 뽑고 거기엔 감성적 평가까지 들어가는데, 그보다 덜 주관적인 주관식 채점만 왜 못 하느냐고. 무서워서 못 하는 것이고 그건 기우라고. 국가교육위원장도 “일리가 있는 질문”이라고 인정했다.
수능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그 논의는 AI 시대, 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에서 따로 다뤘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딱 두 가지다.
하나. 그 배관이 등급밖에 실어 나르지 못하는 이유도 학점은행제와 같은 계열이다. 수시는 대학이 책임지니까 면접이라는 재량이 허용되지만, 수능은 국가가 출제하고 국가가 채점한다. 국가가 재량을 쓰면 그건 곧바로 소송과 국정감사가 된다. 그래서 국가는 자기가 직접 손대는 평가에서 재량을 0으로 만들어야 하고, 오지선다가 그 0을 구현하는 장치다. 킬러 문항조차 난이도의 문제라기보다, 45만 명을 줄 세우고도 아무도 이의를 못 달게 만드는 알리바이에 가깝다.
둘. 그가 왜 되돌아왔는가. 성인 쪽에는 우회로가 있어서 제도를 내려놓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 쪽에는 그 우회로가 없다. 대학에 가지 않을 아이까지 전부 대학 입시에 맞춰 공부를 당하는 구조에서는 배관을 비켜 갈 방법이 없다. 컴퓨터 학원 같은 해법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두 배관은 정반대 방향으로 같은 병에 걸렸다
이제 두 쪽을 겹쳐 놓을 수 있다.
한쪽은 국가가 책임을 너무 안 져서 교육이 사라졌고, 다른 쪽은 국가가 책임을 혼자 다 져서 교육이 사라졌다. 방향은 정반대인데 병은 하나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더 있다. 성인 쪽에는 제도를 비켜 갈 우회로가 있지만, 아이 쪽에는 그것조차 없다.
그런데 이 병을 붙들어 온 조건 하나가 방금 사라졌다
두 배관 중 아이들 쪽이 오래 막혀 있던 진짜 이유는 재량 자체가 아니다. “누구를 봐줬느냐”는 의심이다. 한국에서 입시 공정성 논란이 터질 때 문제가 된 것은 언제나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의혹이었지, 채점 기준이 엉성하다는 항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로 채점하면 그 의심은 성립조차 하지 않는다. 봐줄 대상을 식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채점대 위에 무지의 베일을 치는 것이다.
서술형 채점 자체가 못 할 일이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미 대규모로 하고 있다. 대학 논술전형은 2027학년도에 44개교에서 1만 2782명을 논술 답안으로 뽑고, 경쟁률을 감안하면 채점되는 답안은 그 수십 배다. 변호사시험은 사례형과 기록형을 문항마다 여덟 명 안팎의 위원이 나눠 채점한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수능이라는 한 자리에서만 안 하는 일이다.
더 흥미로운 건 수능 안에도 이미 주관식이 있다는 사실이다.
2026학년도 문항 구성은 이렇다.
| 영역 | 문항 수 | 객관식 | 단답형 | 서술형 |
|---|---|---|---|---|
| 국어 | 45 | 45 | 0 | 0 |
| 수학 | 30 | 21 | 9 | 0 |
| 영어 | 45 | 45 | 0 | 0 |
| 한국사 | 20 | 20 | 0 | 0 |
| 탐구 (과목당) | 20 | 20 | 0 | 0 |
| 제2외국어·한문 (과목당) | 30 | 30 | 0 | 0 |
수학의 단답형 9문항은 1997학년도에 6문항으로 도입돼 2005학년도부터 9문항으로 늘었고, 30년 가까이 아무 시비 없이 굴러갔다. 이유는 답이 0 이상 999 이하의 정수라서 채점자가 개입할 여지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술형 칸은 전 영역에서 0이다.
못 견디는 것은 주관식이 아니라 재량이다. 재량이 0인 주관식은 30년째 하고 있고, 재량이 필요한 서술형만 막혀 있다.
그 서술형이 지금까지 막혔던 이유는 원리가 아니라 물량이었다. 45만 장을 사람이 일관된 기준으로 채점할 방법이 없었고, 채점자가 늘수록 커지는 편차가 다시 의심의 근거가 됐다.
이게 한국만의 사정도 아니다. 일본은 대학입학공통테스트에 국어와 수학 기술식(서술형) 문항을 넣기로 했다가 2021년에 도입을 접었다. 문부과학성이 든 이유가 정확히 그것이었다. 50만 명 넘게 응시하는 시험에서 서술형을 공정하게 채점할 시스템을 확보할 수 없고, 제한된 채점자가 단기간에 정확히 채점할 수 있을지 담보되지 않으며, 인건비도 감당이 안 된다는 것. 교육적으로 반대해서가 아니라 채점 물량 앞에서 접은 것이다. 그게 2021년의 판단이었다.
AI가 그 물량과 일관성을 감당하면서 처음으로 가능해졌다.
이것도 실험실 얘기가 아니다. ETS는 GRE 작문과 TOEFL 작문의 고부담 채점에 자동채점 엔진 e-rater를 인간 채점자와 함께 쓴다. 그리고 검증 연구에서 e-rater와 인간 채점자의 일치도가 인간 채점자 두 명 사이의 일치도보다 높게 나왔다. 기계를 끼워 넣으면 공정성이 흔들릴 것 같지만, 실제로 더 컸던 것은 사람끼리의 편차였다.
다만 AI는 채점자가 아니라 베일이어야 한다. 판정자 자리에 앉히면 재량은 행사되는데 책임질 사람이 사라져, 학점은행제와 똑같은 구멍이 뚫린다. ETS의 방식이 정확히 그 선을 지킨다. 기계는 편차를 줄이는 데 쓰고, 점수에 이름을 거는 것은 사람이다.
설계의 세부는 별도 글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하나다. 이 배관들을 12년과 32년 동안 그 자리에 붙들어 온 조건 가운데 하나가, 방금 사라졌다는 것.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는가
컴퓨터 학원이 왜 굴러갔는지를 다시 보면 답의 방향이 나온다. 그 학원들은 국가가 인증해서 생긴 게 아니다. 엑셀을 못 하면 취업이 안 됐기 때문에 생겼다. 수요가 먼저 있었고 공급은 알아서 따라왔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일은 인증기관에 과목을 하나 더 얹는 게 아니라 다음 세 가지다.
첫째, 학위를 화폐로 쓰지 않는 별도 트랙을 만든다. AI 역량은 이수 시간이 아니라 산출물로 증명된다. 몇 시간 들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었는지를 인정하는 경로가 필요하고, 그건 학점은행제 안에서는 원리상 불가능하다. 같은 파이프에 다른 물을 흘릴 수는 없다.
둘째, 국가는 인증하지 말고 수요를 만든다. 행정·민원·공공 서비스에서 AI 활용을 전제로 절차를 다시 짜고, 공공 조달과 채용에서 AI 활용 산출물을 요구하면 배울 이유가 생긴다. 배울 이유가 생기면 학원은 정부가 부르지 않아도 온다. 컴퓨터 때 정확히 그랬다.
셋째, 지원은 기관이 아니라 사람에게 준다. 평생교육이용권처럼 개인이 직접 쓰는 바우처는 방향이 맞다. 다만 그 돈이 학점 인정 과목에만 쓰이도록 묶여 있으면 결국 같은 파이프로 돌아간다. 쓸 수 있는 곳을 넓히고 인증은 좁히는 것이 순서다.
셋 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답이 나올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반대편 배관의 처방은 이 글의 범위를 넘는다. 다만 방향은 같다. 채점대에 베일을 치고, 그 아래에서 객관식은 줄이고, 서술형은 늘리고, AI를 활용해 푸는 평가를 더하는 것. 지금은 첫 칸 하나만 남아 있고, 그 칸마저 킬러 문항으로 망가진 상태다.
이제부터는 결정의 문제다
그 3분은 무능한 관료가 혼나는 장면이 아니었다. 국가가 국민 손에 새 도구를 쥐어줄 배관이 사실상 없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성인 쪽 배관은 30년 전에 다른 문제를 풀려고 판 것이고, 학위밖에 실어 나르지 못하며, 지금은 그 안에서 학위 장사가 자라고 있는데, 뽑아내자니 복지 현장이 무너진다. 아이 쪽 배관은 등급밖에 실어 나르지 못하고, 그렇게 만든 것은 무능이 아니라 책임을 혼자 진 자의 합리적 방어이며, 비켜 갈 우회로조차 없다.
대통령의 답답함은 사람을 향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기관장의 억울함도 거짓이 아니었다. 이 장면에 가해자가 없다는 것, 그것이 이 문제가 12년 동안, 그리고 저쪽에서는 32년 동안 같은 자리에 있었던 이유다.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가 성립하는 범위는 생각보다 좁다.
성인 쪽에는 처음부터 우회로가 있었다. 학위 파이프를 건드리면 복지 현장이 무너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 옆에 새 길을 내는 일은 아무것도 무너뜨리지 않는다. 대통령이 컴퓨터 학원을 꺼낸 게 그 얘기였다. 인증기관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어도, 12년 내내 누군가는 할 수 있었던 선택이다.
아이 쪽에는 우회로가 없어 정면으로 뚫어야 했는데, 45만 장을 익명으로 일관되게 채점할 연장이 없었다. 이쪽은 게으름이 아니라 물리적 한계였고, 그래서 정말로 아무도 탓할 수 없었다. 그 연장이 지금 생겼다.
그러니 다음에도 이 문제가 같은 자리에 있다면, 그때는 구조가 아니라 결정의 문제다. 가해자가 없다는 말의 유효기간이 여기서 끝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