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왕실은 왜 36촌을 양자로 들이려 하는가?
일본이 왕의 직계 손녀를 두고 36촌 방계의 아들을 후계로 들이겠다고 했을 때, 대부분은 이걸 혈통 집착의 극단으로 읽었다. 600년을 거슬러서라도 핏줄을 찾겠다는 고집이라고. 그런데 촌수를 실제로 계산해보면 정반대 결론이 나온다. 영상 속 화자가 농담처럼 던진 "여러분들과 저도 36촌은 될 것 같은데"라는 말이, 사실은 통계적으로 정확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36촌은 아무도 걸러내지 못한다. 일본은 전 국민이 통과하는 문을 이미 열어둔 셈이고, 그 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자기 역사에 두 번, 로마사에 다섯 번 적혀 있다. 그런데 지난 7월에 성립한 법은 그 문 앞에 빗장을 두 개 걸었다. 왕실이 아니라, 왕실을 지키겠다는 사람들이 건 빗장이다. 그래서 지금 일본이 걸어 들어가고 있는 곳은 자기 전통이 아니라, 수백 년 전 똑같이 문을 잠갔다가 무엇을 잃었는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웃 나라의 자리다.
신년 일반참하에 나선 왕실 일가. 왼쪽부터 기코 비,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나루히토 천황, 마사코 황후, 아이코 내친왕, 가코 내친왕, 히사히토 친왕이다. 이 자리에서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은 아키시노노미야와 히사히토 둘뿐이고, 천황의 딸인 아이코 내친왕에게는 자격이 없다. (사진: NEWS포스트세븐)
36촌도 친척인가
일본 왕실이 후계 문제로 흔들리고 있다. 현행 왕실법상 왕위는 남성 후손만 계승할 수 있는데, 계승 자격을 갖춘 인물이 세 명뿐이다. 왕의 동생인 아키시노노미야(60세), 그 아들 히사히토(19세), 그리고 왕의 삼촌인 히타치노미야(90세)다. 60세 미만은 조카 한 명이다.
왕실 구성원 자체도 줄었다. 지금 왕실은 남성 5명, 여성 11명을 합쳐 16명이다. 1994년의 26명이 정점이었고 그 뒤로는 고령 구성원의 사망과, 평민과 결혼하면 왕실을 떠나야 하는 여성 구성원의 이탈로 계속 깎여 나갔다.
그런데 이 숫자가 이렇게까지 얇아진 진짜 출발점은 혈통 논리가 아니었다. 1947년 10월 14일, 열한 개 방계 왕족 가문의 51명이 하루아침에 평민이 됐다. 이유는 재정이었다. 연합군총사령부가 왕실 재산을 동결했고 최대 90%에 이르는 재산세가 부과되면서 여러 궁가를 유지할 돈이 없어진 것이다. 당시 67명이던 왕족이 한 번에 16명으로 줄었고, 79년이 지난 지금 다시 16명이다.
1947년 10월 18일 아카사카리큐. 황적을 떠나게 된 열한 궁가 사람들이 쇼와 천황이 마련한 작별 만찬에 모여 찍은 기념사진이다. 나흘 전 51명이 하루아침에 평민이 됐고, 79년 뒤 일본이 다시 데려오려는 것이 바로 이 사람들의 후손이다. (사진: 문예춘추)
그래서 나온 대안이 그때 내보낸 그 가문들의 남성 후손을 도로 양자로 들이는 방안이다. 정부는 2026년 6월 30일 임시 각의에서 왕실전범 개정안을 결정해 중의원에 제출했고, 7월 17일 참의원을 통과해 법률이 됐다. 1947년 현행 전범 제정 이래 사실상 첫 본격 개정이다.
그 심의 과정에서 궁내청 차장이 국회에서 답변한 숫자가 논쟁에 불을 붙였다. 옛 왕족 가문의 남성들과 현 왕족의 관계가 36촌에서 38촌 사이라는 것이다. 공통 조상은 무로마치 시대 인물인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伏見宮貞成親王)으로, 그의 아들 히코히토 왕이 1428년 고하나조노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현 왕실 계보가 되고, 다른 아들 사다쓰네 친왕이 후시미노미야를 이어 훗날의 11궁가가 됐다. 약 600년 전 갈라진 두 갈래다.
여기서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온다. 36촌이 친척인가. 우리는 8촌만 넘어가도 세지 않는다. 36촌이면 사실상 남 아닌가. 영상의 화자도 정확히 그 지점을 짚는다. 조선의 26대 왕 고종과 16대 왕 인조가 9대손 관계로 11촌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36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나오는 숫자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이 반응은 옳다. 다만 옳은 방향이 통념과 정반대다.
촌수를 계산하면 조건 자체가 무너진다
촌수는 공통 조상까지 올라간 세대 수와 다시 내려온 세대 수의 합이다. 형제가 2촌인 것은 부모까지 한 세대씩 올라갔다 내려오기 때문이고, 사촌이 4촌인 것은 조부모까지 두 세대씩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36촌은 양쪽으로 각각 18세대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540년, 33년으로 잡으면 594년이다. 사다후사 친왕이 1372년생이고 지금 천황이 1960년생이니 588년, 세대당 32.7년이다. 계산이 맞아떨어진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18세대 위의 조상 자리는 2의 18제곱, 즉 26만 2144개다. 아버지 어머니가 둘, 조부모가 넷, 증조부모가 여덟으로 세대마다 두 배씩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15세기 일본의 인구는 기토 히로시 추계로 1450년 850만 명, 파리스 추계로 960만에서 1050만 명 수준으로 추정된다.
세대를 하나씩 올려가며 필요한 조상 자리를 세어보면 이렇게 된다. 세대당 33년으로 환산한 값이다.
| 거슬러 올라간 세대 | 촌수 | 대략의 시점 | 필요한 조상 자리 |
|---|---|---|---|
| 2세대 | 4촌 | 66년 전 | 4명 |
| 5세대 | 10촌 | 165년 전 | 32명 |
| 10세대 | 20촌 | 330년 전 | 1,024명 |
| 15세대 | 30촌 | 495년 전 | 3만 2,768명 |
| 18세대 | 36촌 | 594년 전(1430년대) | 26만 2,144명 |
| 20세대 | 40촌 | 660년 전 | 104만 8,576명 |
| 23세대 | 46촌 | 759년 전 | 838만 8,608명 |
마지막 줄이 결정적이다. 23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한 사람에게 필요한 조상 자리가 838만 개가 되는데, 이는 기토 추계로 1450년 일본 전체 인구인 850만 명과 사실상 같은 값이다. 가마쿠라 말기까지만 가도 한 사람의 조상 자리가 그 시대 일본인 전부를 삼킨다는 뜻이고, 그 지점부터는 조상의 중복이 통계적 경향이 아니라 산술적 강제가 된다. 궁내청이 말한 600년은 그 문턱 바로 아래다.
문턱 아래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사람에게 26만 개의 조상 자리가 필요한데, 이 자리가 전부 서로 다른 사람이려면 지금 살아 있는 일본인 한 명이 15세기 인구의 3%씩을 독차지해야 한다. 두 사람이면 6%, 세 사람이면 9%다. 서른 명만 세워놓아도 15세기 일본 인구 전체가 소진된다.
게다가 15세기 일본인은 전국에서 배우자를 골랐던 게 아니다. 혼인권은 마을과 군 단위였고 실질 풀은 수천 명 규모였다. 26만 개의 자리를 수천 명이 돌려가며 채운다는 뜻이다. 족보를 위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조상은 무한히 늘어나는 게 아니라, 어느 지점부터 같은 사람이 여러 자리를 동시에 차지하기 시작한다. 계보학에서 혈통 붕괴(pedigree collapse)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겹칠 가능성이 가장 낮은 가정을 써도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두 일본인이 각각 26만 2144개의 자리를 1000만 명 풀에서 전국 무작위로 뽑는다고 치자. 그러면 두 사람이 공유하는 조상 수의 기댓값은 26만 2144의 제곱을 1000만으로 나눈 값, 약 6900명이다. 지역 혼인을 아예 무시한 최소치가 이미 7천 명에 육박한다. 실제 혼인권이 좁았다는 사실을 넣으면 이 숫자는 훨씬 커진다.
이 계산의 결론은 직관을 배신한다. 임의의 두 일본인은 18세대 전에 이미 수천 명의 조상을 공유한다. 36촌 이내라는 관계는 어렵게 찾아내는 인연이 아니라, 일본인 아무나 둘을 세워놓으면 기본값으로 성립하는 관계다. 통계유전학에는 identical ancestors point라는 개념이 있는데, 로데·올슨·창의 2004년 네이처 논문은 전 인류로 확장해도 이 지점이 놀라울 만큼 가깝다는 것을 보였다. 하물며 섬나라라 인구 유출입이 적었던 일본 안에서라면 수렴은 훨씬 빠르다.
36촌 이내라는 조건은 일본인이면 사실상 자동으로 충족된다. 이건 후보를 걸러내는 필터가 아니라, 걸러내지 않으면서 걸러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장치다.
그런데 그 36촌조차 실제 혈연이 아니다
여기서 한 겹 더 들어가면 이 숫자의 정체가 드러난다.
촌수는 원래 가장 가까운 공통 조상까지의 거리다. 그런데 궁내청이 답변한 36촌은 그게 아니다. 아버지에서 아버지로만 따라간 남계 경로 하나를 잰 것이다. 여계를 포함하면 훨씬 가까운 공통 조상이 나온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후보로 거론되는 집안들을 실제로 대보면 이렇다.
메이지 천황의 딸 넷이 지금 문제가 된 그 궁가들로 시집갔다. 제6황녀 마사코 내친왕이 다케다노미야 쓰네히사 왕에게, 제7황녀 후사코가 기타시라카와노미야로, 제8황녀 노부코가 아사카노미야로, 제9황녀 도시코가 히가시쿠니노미야로 갔다. 게다가 히가시쿠니노미야는 그다음 대에 쇼와 천황의 장녀 시게코 내친왕까지 며느리로 맞았다. 2대 연속으로 천황의 딸을 데려간 것이다.
숫자를 붙여보자. 실제로 후보가 있다고 확인된 네 가문을 궁내청이 쓴 것과 같은 방식, 즉 가장 가까운 공통 조상까지 세어보면 이렇게 된다.
| 구분 | 가장 가까운 공통 조상 | 그 조상의 사망 연도 | 현 천황과의 실제 촌수 |
|---|---|---|---|
| 궁내청 국회 답변 |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 | 1456년 | 36~38촌 |
| 히가시쿠니가 (당주 마사히코) | 쇼와 천황 | 1989년 | 5촌 |
| 구니가 (당주 아사타카) |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 | 1929년 | 6촌 |
| 다케다가 (쓰네야스) | 메이지 천황 | 1912년 | 8촌 |
| 가야가 (당주 마사노리) |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 1891년 | 8촌 |
한 줄씩 뜯어보면 더 분명해진다.
남계 계승론의 대표 논객인 다케다 쓰네야스는 메이지 천황에서 마사코 내친왕, 다케다노미야 쓰네요시 왕, 다케다 쓰네카즈를 거쳐 4세대 아래다. 지금 천황 나루히토는 메이지 천황에서 다이쇼, 쇼와, 상왕 아키히토를 거쳐 역시 4세대 아래다. 두 사람의 실제 촌수는 8촌이다. 36촌이 아니라.
남계 계승론의 대표 논객 다케다 쓰네야스. 궁내청이 국회에서 쓴 남계 경로로 재면 천황과 36촌이지만, 메이지 천황의 제6황녀 마사코 내친왕을 한 칸만 세면 8촌이 된다. 같은 두 사람의 거리가 딸을 세느냐 마느냐로 네 배 넘게 벌어진다. (사진: 산케이신문)
구니노미야가는 아예 현 천황의 외가다. 쇼와 천황의 황후이자 상왕 아키히토의 어머니, 지금 천황의 할머니인 고준황후 나가코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세신궁 대궁사인 현 당주 구니 아사타카(1959년생)는 천황(1960년생)의 재종형제, 곧 6촌이다. 두 계보의 공통 조상은 무로마치 시대 사람이 아니라 1929년에 사망한 구니요시 왕이다.
가장 가까운 건 히가시쿠니가다. 3대 당주 히가시쿠니 마사히코는 쇼와 천황과 고준황후의 첫 증손이자 현 천황의 종질(從甥), 곧 5촌이다. 아버지 노부히코가 쇼와 천황의 첫 손자였기 때문이다. 언론이 이 집을 “구궁가 중 현 황실과 혈연이 가장 진한 집”으로 부르는 이유다.
가야노미야가는 구니요시 왕의 형이 세운 집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촌수보다 더 노골적인 사실이 하나 나온다. 현 당주 가야 마사노리는 학습원 초등과부터 대학까지 천황과 같은 학교를 다닌 동급생이다. 36촌 떨어졌다고 국회에서 보고된 사람이 천황의 초등학교 동창이다.
그러니까 궁내청은 국회에서 “600년 전에 갈라졌다”고 답했지만, 그 후보들의 실제 공통 조상은 100년 안팎이고 개중에는 같은 반에서 자란 사이도 있다. 두 숫자가 이렇게 벌어지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36촌은 이 사람들이 실제로 얼마나 먼 친척인지를 잰 숫자가 아니라, 이 사람들을 자격 있게 만들어주는 서류 경로가 얼마나 긴지를 잰 숫자다.
혈연으로 재면 8촌이고, 서류로 재면 36촌이다. 자격의 근거는 앞이 아니라 뒤에 있다.
그러면 이 제도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 계산을 받아들이는 순간, 일본이 만든 물건의 정체가 바뀐다.
혈통주의의 강화가 아니다. 정통성의 형식은 유지하면서 선발 풀은 사실상 전 국민으로 열어놓은 구조다. 겉으로는 “600년 전 조상을 공유하는 방계 후손”이라는 전통의 언어를 쓰지만, 그 조건이 실제로 배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게 왜 드문 설계인가. 세습 체제에 능력주의를 집어넣는 통상적인 방법은 기존 정통성을 부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을 하거나, 공화정으로 갈아엎거나, 헌법을 다시 쓰거나. 그런데 이 방식은 왕실을 해체하지 않고, 국민적 저항 없이, 헌법 개정 없이, 원리적으로는 국민 중 누구든 후계 계보에 편입시킬 수 있는 경로를 만든다.
혈통이 자격 심사에서 통과 의례로 격하된 것이다. 관문이 남아 있긴 한데, 그 관문은 아무도 막지 않는다.
조선과 중국은 정확히 반대로 했다
같은 ‘양자’라는 단어를 써도, 동아시아 세 나라에서 이 제도가 한 일은 완전히 달랐다. 그 차이는 후보 풀의 크기에서 갈린다.
조선의 계후(立後)와 중국 종족의 승계는 둘 다 이성불양(異姓不養) 원칙 위에 서 있었다. 양자는 반드시 같은 성씨의 남계 친족 중에서, 그것도 항렬이 맞는 조카뻘에서만 데려올 수 있었다. 세종 19년(1437)에 정비된 양자법은 동종(同宗)의 지자(支子) 중 소목(昭穆)이 맞는 자를 후사로 삼고 양가와 생가 부모의 합의를 얻도록 했고, 이 원칙이 경국대전 예전 입후조로 굳었다.
법의 문장은 더 노골적이다. 조선이 형률로 그대로 가져다 쓴 대명률 호율은 양이성의자이란종족자 장륙십(養異姓義子以亂宗族者杖六十)이라 했다. 다른 성씨를 양자로 들여 종족을 어지럽히면 곤장 60대이고, 자기 아들을 다른 성씨에게 후사로 준 경우도 죄가 같으며, 그 아들은 원래 종족으로 돌려보낸다(其子歸宗).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성이 다르면 처벌 대상이었다.
일본의 36촌 요건은 요건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실질 제약이 0에 수렴한다.
조선은 좁혀서 피를 지켰고, 일본은 넓혀서 피를 형식으로 만들었다. 표면상 둘 다 혈통 양자인데 결과가 정반대다.
여기에 상속 방식이 결정적인 차이를 하나 더 만든다. 중국은 제자균분(諸子均分), 즉 아들들이 재산을 나눠 가졌다. 대가 바뀔 때마다 사업체가 쪼개지니 조직이 세대를 넘어 축적될 수가 없다. 조선도 균분에서 장자 우대로 이동했지만 가업 승계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다.
일본은 단독상속에 양자를 결합했다. 자산이 쪼개지지 않고, 이을 사람이 없으면 밖에서 데려온다. 결과는 숫자로 남았다. 데이코쿠데이터뱅크 집계로 업력 100년을 넘긴 일본 기업은 2025년 12월 기준 4만 6708개사이고, 1000년을 넘긴 곳도 11개사다. 가장 오래된 회사는 578년 창업한 곤고구미인데, 창업자는 쇼토쿠 태자가 백제에서 불러들인 세 장인 중 하나인 유중광(금강중광)이다. 1400년 넘게 이어진 이 회사조차 창업자의 직계 혈통이 아니라 자리와 기술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연쇄로 유지됐다. 이에(家)는 사실상 근대 법인(corporation)의 전신처럼 작동했다. 소유자가 죽어도 자리가 유지되고, 자리에 맞는 사람을 외부에서 충원하는 구조 -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관습으로 미리 학습한 셈이다.
오사카 시텐노지. 578년 창업한 곤고구미가 1400여 년간 짓고 고쳐 온 절이다. 창업자 유중광은 쇼토쿠 태자가 백제에서 부른 장인이었지만, 이 회사를 1400년 버티게 한 것은 그의 핏줄이 아니라 자리와 기술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연쇄였다.
세 나라를 나란히 놓으면 같은 단어가 얼마나 다른 물건이었는지가 한눈에 보인다.
| 조선 | 중국(명·청) | 일본 | |
|---|---|---|---|
| 양자의 성씨 요건 | 이성불양, 동종의 지자 | 이성불양, 동종 | 없음(타성·사위·봉공인 모두 가능) |
| 위반 시 | 대명률을 형률로 준용 | 장 60대, 그 아들은 귀종 | 해당 규정 자체가 없음 |
| 실질 후보 풀 | 항렬 맞는 동성 친족 수십 명 | 종족 내 수십 명 | 사실상 제한 없음 |
| 재산 상속 | 균분에서 장자 우대로 | 제자균분 | 단독상속 |
| 무능한 후계자 교체 | 불가 | 불가 | 폐적·주군압입으로 가능 |
| 승계의 판단 기준 | 혈통의 순도 | 혈통의 순도 | 가업을 이을 능력 |
| 시간이 지나며 나타난 추세 | 부계입양 비율 상승, 양반일수록 더 좁힘 | 대가 바뀔 때마다 사업체 분할 | 100년 기업 4만 6,708개사 |
표의 마지막 줄이 이 비교의 결론이다. 조선과 중국은 시간이 갈수록 문을 좁혔고 일본은 열어둔 채로 갔는데, 수백 년 뒤 남은 것은 축적된 조직의 수로 갈렸다.
일본 상가의 양자는 실제로 인재 선발이었다
일본의 이에는 혈연 집단이 아니라 가업·가명·가산이 붙어 있는 자리에 가까웠다.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직능체다. 비교가족사 연구자들이 정리한 대로, 중국과 조선의 종족이 혈연의 순도를 절대 조건으로 놓은 반면 일본의 이에는 경영체로서 후계자의 덕과 재능을 혈연보다 앞세웠다. 그래서 다른 성씨 양자, 사위 양자, 심지어 아무 연고 없는 봉공인 양자까지 광범위하게 허용됐다. 조선이라면 종중이 뒤집어질 일이 일본에서는 표준 절차였다.
여기서 결정적인 게 폐적(廃嫡)이다. 친자가 가업을 잇기에 부족하면 물러나게 하고 더 나은 사람을 앉히는 것이 규범적으로 정당화됐다. 1722년에 제정된 미쓰이가의 가헌 종축유서(宗竺遺書)는 50여 개조로 일족의 결속과 가산의 불가분(身上一致)을 규정하면서 양자의 처우를 별도 조항으로 두었고, 이 문서는 1900년 미쓰이가헌으로 개정될 때까지 약 200년간 일족의 헌법 노릇을 했다. 오미상인의 가훈들도 마찬가지로 연공서열이 아니라 실력 본위를 명문화했다.
이게 문서상의 이상론이 아니었다는 건 인류학 조사가 확인한다. 비어즐리 연구팀의 1959년 농촌 조사는 조사 대상 가문의 25~33%가 그 역사 속에서 양자가 친자를 제치고 후계가 된 사례를 최소 한 번은 갖고 있다고 보고했고, 펠젤은 25%, 배크닉은 34%로 추정했다. 근세 기록에서는 빈도가 더 높게 나타난다. 서너 집 걸러 한 집꼴로 실제 교체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더 나아간 장치도 있었다. 무가 사회에는 주군압입(主君押込)이라는 관행이 있었다. 행실이 나쁘거나 무능한 번주를 가로들의 합의로 강제 감금해 은거시키는 것으로, 가마쿠라 시대부터 이어져 에도 막번체제에서 제도처럼 굳었다. 가사야 가즈히코의 연구가 요약한 이 관행의 논리는 한 문장이다. 주군보다 가문(御家)이 우선한다. 사람이 자리에 못 미치면 사람을 바꾼다는 원칙이, 상가의 폐적과 무가의 압입이라는 두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다. 조선에서 “장남이 무능하니 폐하고 유능한 타성을 종손으로 세우자”는 말은 문장으로 성립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가에는 실제 승진 사다리가 있었다. 열 살 남짓에 데치(丁稚)로 들어와 테다이(手代)를 거쳐 반토(番頭)로 올라가고, 최상위 반토가 벳케(別家)로 독립하거나 노렌와케(暖簾分け)로 분점을 받거나 사위 양자로 본가를 승계했다. 15년에서 20년에 걸쳐 관찰된 실적이 승계의 근거가 되는 구조다. 내부 노동시장과 토너먼트 승진과 후계 지명이 결합된 형태로, 이걸 능력주의적이라고 부르는 건 과장이 아니다.
가장 흔한 형태가 딸과 결혼시킨 사위를 양자로 들이는 무코요시(婿養子)다. 폴슨의 조사로는 1981년 일본 입양의 55%가 사위 입양이었다. “아들은 고를 수 없지만 사위는 고를 수 있다”는 말이 이 관행의 논리를 정확히 요약한다. 친자는 표본이 한둘이지만, 사위 양자는 회사 전체 직원이 후보 풀이 된다.
그리고 이 방식은 실제로 성과가 좋았다. 메로트라·모크·심·위와타나칸탕이 1962년부터 2000년까지의 일본 상장 비금융기업 1,367개사, 즉 당시 상장사의 95%를 사실상 전수 분석한 2013년 저널 오브 파이낸셜 이코노믹스 논문의 결론은 이렇다. 비혈연 후계자가 경영한 기업이 친자 승계 기업을 앞질렀고, 창업자가 직접 경영하는 상장사와 거의 맞먹었다. 논문이 제시한 메커니즘은 세 가지다. 비혈연 후계자가 재능 분포의 왼쪽 꼬리에 있는 무능한 친자를 밀어내고, ‘양자 자리’라는 상이 스타 매니저들을 뛰게 만들며, 밀려날 수 있다는 위협이 친자마저 인적자본에 투자하게 만든다. 저자들은 마지막 효과를 두고 상속받은 부가 재능을 무디게 만든다는 카네기 가설(Carnegie conjecture)을 완화한다고 썼다. 양자 제도의 진짜 효과는 뽑힌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안 뽑힐 수 있다는 사실이 모두를 움직이게 하는 데 있다는 뜻이다.
선발이 실제로 걸러냈다는 증거도 같은 논문 안에 있다. 표본의 승계 425건 중 친자 승계는 242건, 비혈연 후계는 42건인데, 친자 후계자 중 제국대학 출신은 51명으로 21%인 반면 비혈연 후계자는 17명으로 41%였다. 밖에서 데려온 쪽이 학력에서 거의 두 배 앞선다. 태어나서 자리에 온 사람과 골라져서 자리에 온 사람의 차이가 통계로 남아 있는 셈이다. 정식으로 입양된 사위만 따로 보면 회계 이익률에서 친자 후계를 0.61%포인트 앞섰고, 이들의 최고경영자 재임 기간 중앙값은 19년이었다.
이름을 대면 더 분명해진다.
| 기업 | 양자로 들어온 후계자 | 원래 성 | 형태 | 남은 결과 |
|---|---|---|---|---|
| 도요타자동차공업 | 도요다 리사부로 | 고다마 | 사위 양자(1915) | 초대 사장 |
| 마쓰시타전기 | 마쓰시타 마사하루 | 히라타(백작가 차남) | 사위 양자(1940) | 2대 사장, 화족이 상가로 들어옴 |
| 가지마건설 | 가지마 모리노스케 | 나가토미 | 사위 양자 | 3대 연속 양자 경영 |
| 스즈키 | 도시조 / 지쓰지로 / 오사무 | 기무라 / - / 마쓰다 | 사위 양자 3대 연속 | 창업가 친자 사장은 2015년이 처음 |
| 닌텐도 | 후사지로 / 세키료 / 시카노조 | (나오시치의 양자) / 가네다 / 이나바 | 양자 3대 연속 | 4대 히로시가 22세에 취임 |
가지마의 사례는 특히 노골적이다. 사위 양자로 들어온 가지마 모리노스케는 나가토미 집안 출신 외교관으로 가지마 세이이치의 장녀와 결혼해 들어와 전후 첫 사장이 됐는데, 자기 친아들을 건너뛰고 양자 둘을 각각 사장과 회장에 앉혔다. 둘 다 모리노스케의 친딸과 결혼한 사람들이었다. 모리노스케의 친아들이 경영 전면에 나온 것은 나중에 들어온 사위 양자가 사장에서 회장으로 올라간 뒤였다. 양자로 들어온 사람이 다음 대에도 같은 규칙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도요타자동차공업의 초대 사장 도요다 리사부로는 원래 고다마 리사부로였고 1915년 도요다 사키치의 장녀와 결혼해 사위 양자로 들어왔다. 마쓰시타전기의 2대 사장 마쓰시타 마사하루는 백작 히라타가의 차남으로, 1940년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딸과 결혼하며 양자가 됐다. 화족이 상인 집안의 사위 양자로 들어간 것이다.
스즈키는 더 극단적이다. 창업자 스즈키 미치오 다음의 2대 스즈키 도시조(원래 기무라), 3대 스즈키 지쓰지로, 4대 스즈키 오사무(원래 마쓰다)까지 세 대 연속으로 사위 양자가 사장을 맡았다. 창업가의 남계 친자가 사장이 된 것은 2015년 스즈키 도시히로가 처음이다. 1909년 창업 이후 106년 만이었다.
스즈키 회장 스즈키 오사무. 원래 성은 마쓰다였고, 창업가의 딸과 결혼해 사위 양자로 들어와 4대를 맡았다. 명패에 적힌 성이 핏줄이 아니라 자리에 붙어 있다는 것을 이 한 장이 보여준다. (사진: GQ재팬)
닌텐도의 계보는 이 문화의 극단적 사례다. 창업자 야마우치 후사지로부터가 1872년 야마우치 나오시치의 양자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에게 아들이 없어 외동딸의 사위 양자 야마우치 세키료(원래 가네다)가 2대를 이었고, 세키료 역시 아들이 없어 장녀의 사위 양자 야마우치 시카노조(원래 이나바)를 후계로 세웠다. 그런데 시카노조가 이웃 여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고, 그 아들 야마우치 히로시는 조부모 손에 자라다 1949년 세키료가 쓰러지자 스물두 살에 사장이 됐다. 화투 회사를 세계 최대 게임 회사로 바꾼 그 사람이다. 그리고 그조차 훗날 장남 가쓰히토의 아들을 자기 양자로 들여, 야마우치 만조는 호적상 친아버지의 동생이 됐다.
일본에서 입양되는 사람의 대다수가 성인 남성이라는 통계는 이 구조의 요약이다. 2000년 신고된 입양 8만 790건 중 아동 입양은 1356건뿐이고 나머지 7만 9434건, 즉 98%가 성인 입양이었으며 1990년 이후 이 비율은 97~98%로 유지된다. 보호가 필요한 아이를 키우는 제도가 아니라, 자리를 물려받을 사람을 지정하는 제도다. 서구인이 이 관행을 처음 접하고 경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공한 승계 능력주의는 대부분 이 형태였다
여기서 로마가 등장한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오현제로 불리는 다섯 황제는 전원 양자 승계였고, 서기 96년부터 180년까지 이 구간이 로마사의 최전성기로 꼽힌다. 기번이 1776년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인류의 조건이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를 하나 꼽으라면 주저 없이 도미티아누스의 죽음에서 콤모두스의 즉위까지를 들겠다고 쓴 바로 그 구간이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형식적으로는 모두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트라야누스는 히스파니아 속주 출신이었지만 네르바의 양자가 되어 즉위했다. 혈통 자격을 갖춰서 황제가 된 게 아니라, 황제가 되기 위해 혈통 자격을 사후에 부여받았다.
형식은 혈통, 실질은 선발. 이게 세습 체제가 유전자 로또를 극복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 실험이 어떻게 끝났는지가 더 중요하다. 승계를 한 줄로 세우면 이 제도가 무엇에 기대고 있었는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 황제 | 재위 | 즉위 경로 | 살아남은 친아들 |
|---|---|---|---|
| 네르바 | 96~98 | 원로원 추대 | 없음 |
| 트라야누스 | 98~117 | 네르바의 양자 | 없음 |
| 하드리아누스 | 117~138 | 트라야누스의 양자 | 없음 |
| 안토니누스 피우스 | 138~161 |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 아들 둘 모두 즉위 전 사망 |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161~180 | 안토니누스의 양자 | 콤모두스 생존 |
| 콤모두스 | 180~192 | 친아들 | 192년 암살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여섯 번의 승계 중 앞의 다섯 번이 양자였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친아들 콤모두스에게 물려준 여섯 번째에서 무너졌다. 콤모두스가 192년 암살되자 이듬해 곧바로 다섯 황제의 해가 왔다.
네 번째 열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앞선 네 황제에게 마침 친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작동한 것이지, 제도가 그렇게 설계되어서가 아니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지만 즉위 전에 모두 죽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도 콤모두스의 쌍둥이 형제와 동생이 있었으나 각각 165년과 169년에 죽어 콤모두스가 여덟 살에 유일한 후계자가 됐다. 그래서 콤모두스는 거의 한 세기 만에 아버지를 이어 즉위한 첫 친아들이었다. 아들이 살아남는 순간 원상 복귀되는 구조였다는 뜻이다.
사자 가죽을 쓰고 곤봉을 든 콤모두스 흉상(로마 카피톨리노 미술관). 다섯 번 이어진 양자 승계를 끊고 즉위한 첫 친아들이며, 스스로를 헤라클레스로 꾸미다 재위 12년 만에 암살됐다. 선발이 아니라 출생으로 자리에 온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가 이 대리석에 남아 있다.
일본에는 이 계보 위에 자기 전례가 이미 두 개 있다.
하나는 6세기의 게이타이 천황이다. 오진 천황의 5세손이라 기록되지만 아버지도 조부도 증조부도 천황이 아니었고, 일본서기 본문은 그 사이 계보를 생략했으며 고사기에도 설명이 없다. 에치젠에서 왔고 야마토에 들어가기까지 20년이 걸렸다. 그래서 지방 호족 출신의 새 왕조 시조로 보는 왕조교체설이 학계에서 유력하게 유지된다. 5세손보다 먼 방계가 천황이 된 예는 그전에도 없었다. 계보가 정통성을 만든 게 아니라, 정통성이 계보를 요구했고 계보가 뒤따라 쓰였다.
다른 하나는 1779년의 고카쿠 천황이다. 고모모조노 천황이 스물둘에 딸 하나만 남기고 죽자, 방계인 간인노미야가에서 양자를 들여 즉위시켰다. 공통 조상은 히가시야마 천황이고, 고카쿠는 그 3세대 아래, 고모모조노는 4세대 아래다. 7촌이다. 지금 논의되는 36촌의 5분의 1이다. 일본 역사상 가장 먼 방계 계승 축에 드는 사례조차 한 자리 촌수였다.
그런데 이 1779년 사례에서 더 중요한 건 선택 방식이다. 처음에는 혈통이 더 가까운 간인노미야 하루히토 친왕(당시 23세)이 후보였다. 그런데 그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선왕의 유일한 유아인 요시코 내친왕을 다음 대의 비로 맞이한다는 조정의 구상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아홉 살에 미혼이던 사치노미야가 대신 선택돼 고카쿠 천황이 됐다. 더 가까운 피가 목적 적합성에 밀렸다. 그리고 고카쿠부터 지금 천황까지는 전부 남계 직계로 이어졌다. 일본은 이미 247년 전에, 혈연 근접성이 아니라 자리의 요구를 기준으로 사람을 골라본 적이 있다.
로마는 우연히 아들이 없어서 다섯 번 성공했지만, 일본은 아들이 없는 상황을 제도로 상시화해 두었다. 이에 제도는 애초에 “이을 사람이 없으면 밖에서 데려온다”를 기본값으로 갖고 있다. 로마가 우연히 다섯 번 해낸 것을, 일본은 수백 년간 관습으로 운영해왔다.
잘 쓰면 어떤 제도가 되는가
이 관점에서 보면, 지금 일본이 손에 쥔 것은 비판받을 기행이 아니라 상당히 희귀한 제도적 자산이다.
첫째, 유전자 로또를 제거한다. 세습 군주제의 근본 결함은 국가의 상징을 누가 태어나느냐에 맡긴다는 것이다. 지명제는 이 결함을 정면으로 해결한다. 누가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누가 검증됐느냐가 기준이 된다.
둘째, 정통성이 유지된다. 형식적 혈통 연결이 존재하므로 전통과 단절되지 않는다. 상징 군주에게 정통성은 장식이 아니라 실질 자산이다. 그 자리의 유일한 직무가 국민 통합의 구심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선거의 부작용을 피한다. 국민 통합의 상징을 선거로 뽑으면 그 순간 당파적 인물이 된다. 득표한 쪽과 못 한 쪽이 갈리고, 통합의 상징이 분열의 산물이 되는 자기모순이 발생한다. 지명제는 통합 기능을 보존한 채 인물의 질만 끌어올릴 수 있다.
넷째, 후보 풀이 압도적으로 크다. 조선식 수십 명이 아니다. 앞의 계산대로라면 실질 후보는 1억 2천만 명이다.
국민 누구나 존경하는 인물 -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스포츠 선수든, 과학자든, 오랜 공적 헌신으로 신망을 쌓은 인물이든 - 을 왕실 계보에 편입시킬 수 있다면, 상징 군주라는 직무의 목적함수에는 이보다 잘 맞는 방식을 찾기 어렵다. 실권 없는 자리에 국민이 존경하는 사람을 앉히는 것이 목적이라면, 선거보다 지명제가 오히려 적합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은 그 지명을 정당화할 형식적 근거를 이미 갖추고 있다.
지금 일본은 이 잠재력을 스스로 봉인해 두고 있다
문제는 제도의 원리가 아니라 운용이다. 7월 17일 성립한 개정 전범에는 잠재력을 무력화하는 조항이 두 개 있다.
첫째, 입양된 본인은 즉위할 수 없고 그 아들만 계승 자격을 갖는다. 양자로 들어온 사람은 ‘왕’이라는 칭호를 받지만 황위 계승 자격은 부여받지 못하고, 그 자녀가 남자일 경우에 비로소 자격이 생긴다. 이게 결정적이다. 아무리 훌륭한 인물을 데려와도 왕이 되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아들이다. 검증된 사람이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즉위한다. 능력주의 효과가 한 세대 만에 소멸하고 정확히 혈통 로또로 복귀하는 설계다. 오현제 방식이 되려면 본인 즉위가 열려야 한다. 지금 구조에서 입양 대상자는 후계자가 아니라 징검다리이고, 실제로 이 조항은 국회 심의에서 야당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으며 입헌민주당 등은 이를 이유로 반대표를 던졌다.
둘째, 후보를 1947년 신분 박탈된 11개 가문으로 사전 한정했다. 야마시나, 가야, 구니, 나시모토, 아사카, 히가시쿠니, 다케다, 기타시라카와, 후시미, 간인, 히가시후시미. 여기에 15세 이상이면서 배우자와 자녀가 없는 남성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촌수 자체는 전 국민급인데, 실제 명단은 족보가 문서화된 11가문으로 좁혀져 있다.
그런데 이 조항이 실제로 만들어낸 숫자를 보면 문제가 더 분명해진다. 79년은 열한 개의 가문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 궁가 | 현재 상태 | 대상이 되는 미혼 남계남자 |
|---|---|---|
| 히가시쿠니 | 남계 남성 있음 | 6명(미부가 포함) |
| 다케다 | 남계 남성 있음 | 2명 |
| 가야 | 남계 남성 있음 | 2명 |
| 구니 | 남계 남성 있음 | 1명 |
| 아사카 / 후시미 | 남계 남성 있음 | 대상자 확인 안 됨 |
| 기타시라카와 | 후계자 없음 | 0 |
| 야마시나 / 나시모토 / 간인 / 히가시후시미 | 이미 단절 | 0 |
결론 - 문제는 36촌이 아니라 그 뒤에 붙은 두 줄이다
표의 합계를 내면 이 법의 운명이 이미 나와 있다. 열한 개 가문 중 넷은 이미 단절됐고 하나는 후계자가 없으며, 나머지에서 확인되는 대상자는 열한 명이다. 그리고 이 열한 명은 입양돼도 즉위하지 못한다. 법이 성립한 날, 계승 자격자는 한 명도 늘지 않았다. 늘어나려면 그들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 일본은 왕위 계승 문제를 특정 열한 명의 출산 결과에 다시 맡긴 것이다. 79년 전 재정 때문에 51명을 내보내며 뚫린 구멍을, 혈통 로또를 한 세대 뒤로 미루는 방식으로 메웠다.
실패하는 것은 제도의 원리가 아니다. 원리는 정반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36촌이라는 조건은 계산해보면 단 한 사람도 배제하지 않는다. 일본은 전 국민 공모의 자격 요건을 스스로 발행해 놓고, 그것을 열한 가문의 족보 열람 명단으로 쓰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일본 자신의 역사에 이미 적혀 있다. 상가는 열 살에 들어온 사람을 15년, 20년 지켜본 뒤 사위 양자로 삼아 가업을 넘겼고, 친자가 모자라면 폐적했다. 1779년 조정은 혈통이 더 가까운 스물세 살 친왕을 자리의 요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락시켰다. 로마의 다섯 황제는 지목된 본인이 그대로 즉위했다. 공통점은 하나다. 검증이 끝난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혔다.
개정법은 정확히 그 반대를 한다. 15세 이상, 미혼, 자녀 없음. 관찰할 실적이 아직 없는 사람만 후보로 남기고, 그렇게 뽑힌 사람마저 즉위에서 배제한 뒤, 그가 낳을 아들을 기다린다. 천 년 넘게 축적한 자기 승계 기술을 조항 두 줄로 뒤집어 놓은 설계다.
후보를 열한 가문으로 한정한 조항은, 이름만 다를 뿐 조선의 이성불양과 하는 일이 정확히 같다. 족보에 적힌 사람만 세고,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뛰어나도 세지 않는다. 일본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멀리까지 축적하게 만든 것은 피가 아니라 그 개방성이었다. 100년 기업 4만 6708개사도, 1400년을 버틴 회사도 거기서 나왔다. 그런데 지금 일본은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그 입양 문화를 스스로 부수면서, 자기가 넘어섰던 조선의 길로 되돌아가고 있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그 앞에 서서 방문객의 족보를 받는 일, 조선이 500년 동안 하던 것이 정확히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