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엔 왜 세계급 놀이공원이 하나도 없는가 - 먼저 지어서가 아니라 반씩 나눠 지어서다
수도권에 2,600만 명이 사는데 세계급 테마파크가 하나도 없다. 시장이 작아서라고들 한다. 그런데 화성에 부지를 잡아둔 국제테마파크는 19년째 첫 삽을 못 떴다. 수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반쯤 팔려버린 수요만 남아 있어서다. 그리고 똑같은 일이 통신에서 여덟 번, 은행에서 한 번, 대학과 전력과 철도에서는 이름도 없이 반복되는 중이다. 이 저주에 걸린 산업과 걸리지 않은 산업을 가르는 선이 하나 있는데, 그 선은 이미 한국 경제 통계에 한 줄로 찍혀 있다.
1. 19년째 첫 삽을 못 뜬 땅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테마파크 부지가 있다. 2007년에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유치하겠다며 잡아둔 땅이다.
그 뒤로 벌어진 일을 시간순으로 적으면 이렇다.
| 연도 | 일어난 일 |
|---|---|
| 2007 | 유니버설 스튜디오 유치 MOU 체결 (USKR 컨소시엄·수자원공사) |
| 2012 | 최대주주 롯데와 토지대금 협상이 결렬돼 1차 무산 |
| 2015 | 공모 방식으로 바꿔 유니버설 재유치 발표 |
| 2017 | 사업협약 연장이 거부돼 2차 무산 |
| 2019 | 신세계프라퍼티 사업자 선정, “2021년 착공, 2026년 1차 개장” 발표 |
| 2021 | 착공 목표 불이행 |
| 2024 | 파라마운트 IP 유치 발표(10월), 총투자비 4조 6천억 원에서 9조 4,684억 원으로 확대(11월), 관광단지 지정(12월) |
| 2026 | 착공 목표는 다시 하반기, 개장 목표는 2030년 |
19년 동안 세계 최상위 IP가 두 번 들어오려다 무산됐고, 국내 최대급 유통기업이 7년째 붙들고 있는데도 착공이 안 됐다. 그 사이 착공 목표는 2021년에서 2026년으로 밀렸고 투자비는 두 배가 됐다. 보통 이런 결과에는 “한국 시장이 작다”는 설명이 붙는다.
그런데 그 설명은 숫자와 맞지 않는다. 수도권 인구는 2,600만 명이고, 상하이(2016년 디즈니)나 베이징(2021년 유니버설)이 세계급 테마파크를 유치할 때의 배후 인구와 비교해 결정적으로 적지 않다. 소득은 오히려 높다.
| 도시권 | 대표 파크 (개장) | 배후 인구 | 1인당 GDP (2024) | 2024 방문객 |
|---|---|---|---|---|
| 서울 수도권 | 에버랜드 (1976) · 롯데월드 (1989) | 약 2,600만 | 약 3.6만 달러 | 560만 · 530만 |
| 도쿄권 | 도쿄 디즈니랜드 (1983) · 디즈니씨 (2001) | 약 3,700만 | 약 3.2만 달러 | 1,510만 · 1,244만 |
| 상하이 | 상하이 디즈니랜드 (2016) | 2,480만 | 약 3.0만 달러 | 1,470만 |
| 간사이권 |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 (2001) | 약 2,000만 | 약 3.2만 달러 | 1,600만 |
| 베이징 | 유니버설 스튜디오 베이징 (2021) | 약 2,180만 | 약 3.2만 달러 | 978만 |
| 홍콩 | 홍콩 디즈니랜드 (2005) | 약 750만 | 약 5.4만 달러 | 794만 |
방문객은 2024 TEA Global Experience Index 기준. 1인당 GDP는 상하이·베이징은 도시 기준, 한국·일본·홍콩은 국가 기준이다.
수도권은 상하이·베이징보다 사람이 많고 소득도 높다. 그런데 에버랜드와 롯데월드를 합친 1,090만 명이 상하이 디즈니랜드 한 곳의 1,470만 명에 못 미친다. 인구가 수도권의 3분의 1도 안 되는 홍콩의 파크 하나가 794만 명을 받는다. 수요가 모자란 도시권의 숫자가 아니다.
시장이 작은 게 아니라면, 남는 설명은 하나다. 시장은 충분한데 남은 몫이 부족하다.
2. 인프라는 준공되는 순간 자산이 아니라 부채가 된다
먼저 개별 기업 이야기를 접어두고, 인프라라는 물건의 성질부터 봐야 한다.
인프라를 지을 때 우리는 건설비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인프라의 진짜 비용은 준공된 다음부터 발생한다. 건설비는 한 번 내면 끝이지만 유지비는 매년 나가고, 노후화될수록 가속으로 늘어난다.
한국은 지금 그 청구서가 한꺼번에 도착하는 구간에 들어섰다. 2034년이면 30년 이상 노후 시설물이 전체의 49.9%에 이르고, 유지관리비는 2026~2035년 118조 원에서 2036~2045년 300조 원으로 2.5배 뛴다. 1970~90년대에 압축적으로 지었으니 만기도 압축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총액이 아니라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느냐다. 유지비는 하늘에서 오지 않는다. 같은 예산 안에서 신규 건설과 경쟁한다. 2050년 유지비가 52조 원인데 재원은 제자리라면, 늘어난 유지비만큼 새로 지을 능력이 자동으로 차감된다.
그래서 인프라는 준공되는 순간 자산 항목에서 부채 스케줄로 옮겨간다. 이것이 첫 번째 저주다. 먼저 선진국이 되었다는 말은, 갚아야 할 인프라 만기표가 가장 두꺼운 나라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3. 그런데 낡아가는 그 시설이 새 시설을 막는다
첫 번째 저주만이라면 이야기는 단순하다. 낡으면 새로 지으면 된다.
문제는 낡은 시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새 시설의 진입을 막는다는 데 있다. 이것이 두 번째 저주이고, 이쪽이 훨씬 지독하다.
에버랜드는 2006~2010년 연 617~750만 명으로 세계 10위였는데, 2024년에는 560만 명으로 공동 20위까지 내려왔다. 롯데월드는 530만 명으로 23위다. 그 사이 수도권 인구도 소득도 늘었다. 수요가 줄어서 방문객이 준 게 아니라, 시설이 뒤처져서 줄었다.
왜 갱신을 못 했나. 돈이 없어서다. 롯데월드는 연 매출 4,019억 원 규모라 수백억짜리 어트랙션 하나도 결정이 어렵고, 놓을 땅은 부족한데 관리비는 높다. 잠실 도심의 실내 파크라 증설이 아니라 교체를 해야 하는데, 교체는 철거비와 영업중단 손실까지 얹힌다.
여기까지는 개별 기업의 사정이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다.
두 사업자가 각각 560만과 530만을 가져가고 있으면, 신규 진입자에게 남는 것은 이미 절반 넘게 팔린 시장이다. 3조 원짜리 투자를 회수해야 하는 사업자 입장에서 그 잔여 수요로는 계산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의 진입장벽은 독점이 아니라 분할이다. 압도적인 1등이 하나 있다면 나머지를 노린 도전이라도 나온다. 그런데 어정쩡한 둘은 각자 갱신할 규모도 못 갖춘 채, 남의 회수 가능성만 갉아먹는다. 선발도 후발도 세계급이 못 되는 균형이 여기서 고착된다.
4. 일본은 왜 예외인가 - 그리고 정말 예외인가
바로 반례가 떠오른다. 도쿄 디즈니는 사실상 경쟁자가 없는데도 판타지 스프링스 한 곳에 3,200억 엔, 약 3조 원을 넣었다. 롯데월드 매출 7년치를 확장 한 건에 쓴 셈이다.
일본은 저주를 피한 걸까. 정확히는 그 반대다. 일본은 인프라의 저주에서 한국보다 앞서 있고 더 깊다. 2040년이면 일본 도로교의 50년 초과 비중이 30%에서 약 75%로, 터널은 22%에서 53%로 뛴다. 기초지자체가 관리하는 교량은 보수 착수율이 30%에 불과하다. 나머지 70%는 고칠 돈이 없어 방치되는 중이다.
결제와 행정에서도 일본은 이 저주의 교과서다. 팩스와 도장과 현금 인프라가 충분히 잘 작동한 탓에 갱신이 막혔고, 그 사이 신용카드 인프라가 아예 없던 중국이 QR결제로 곧장 건너뛰었다.
그러니까 저주는 나라 단위로 걸리는 게 아니라 산업 단위로 걸린다. 일본은 인프라와 결제에서 패자이고 테마파크에서 승자다.
그럼 테마파크만 왜 다른가. 오리엔탈랜드의 2026년 3월기 매출은 7,045억 엔, 영업이익은 1,684억 엔이다. 호텔과 리조트가 포함된 수치라 롯데월드와 완전한 동일 기준 비교는 아니지만, 자릿수가 다르다는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3,200억 엔은 오리엔탈랜드에게 매출의 절반이고 롯데월드에게는 매출의 7배다. 같은 투자를 두고 한쪽은 큰 결정이고 다른 쪽은 물리적 불가능이다.
그리고 그 규모 격차는 경영 능력이 만든 게 아니다. 시작점이 만들었다.
도쿄 디즈니는 1983년 개장 시점에 이미 세계 최상급 IP였다. 어정쩡한 선점자가 아니라 세계급 선점자로 출발했다.
그리고 도쿄 디즈니는 접근성과 규모를 동시에 가졌다. 이 조합이 한국에는 없다.
도쿄 디즈니는 도쿄역에서 JR로 15~20분, 역에서 도보 5분 거리이고 롯데월드는 잠실역에 바로 붙어 있어, 대도시 접근성은 둘 다 최상급이다. 그런데 롯데월드의 면적은 128,246㎡로 그 안에 백화점과 호텔과 쇼핑몰이 함께 들어 있는 반면, 도쿄 디즈니랜드는 파크 하나만 51만㎡이고 호텔과 상업시설을 합친 리조트 전체는 약 200만㎡다. 파크만 놓고 봐도 네 배, 리조트 전체로는 열다섯 배다.
에버랜드는 반대편에 서 있다. 땅은 있는데 멀다.
| 도쿄 디즈니 리조트 | 롯데월드 | 에버랜드 | |
|---|---|---|---|
| 도심 접근성 | 도쿄역에서 JR 15~20분 + 도보 5분 | 잠실역 직결 | 서울 남동쪽 35km, 강남에서 버스 40~50분 |
| 면적 | 파크 하나 51만㎡, 리조트 약 200만㎡ | 128,246㎡ (백화점·호텔 포함) | 시설부지 약 20만 평 (약 66만㎡) |
| 2024 방문객 | 1,510만 + 1,244만 | 530만 | 560만 |
| 가진 것 | 접근성 + 규모 | 접근성 | 규모 |
한국의 두 파크는 도쿄 디즈니가 가진 두 조건을 하나씩 나눠 가졌다. 시장만 둘로 나뉜 게 아니라 조건까지 둘로 나뉜 것이다.
도쿄가 그 조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도심 코앞의 바다를 메워 없던 땅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한국도 같은 방법을 썼지만 결과가 달랐다. 화성 국제테마파크 부지는 시화호 간척지이고 인스파이어는 영종도 매립지인데, 서울 코앞에는 메울 바다가 없어 두 곳 모두 서울에서 한 시간이 넘는다. 도쿄가 20분 거리에 만들어낸 조건을 서울은 만들 수 없었다.
이것이 선진국의 저주가 공간에 남기는 자국이다. 도심이 꽉 찬 뒤에는 대형 신규 시설이 들어갈 자리가 도심 안에 남아 있지 않다. 남은 땅은 늘 멀리 있고, 멀면 사람이 오지 않는다.
임계 규모를 넘으면 저주의 방향이 뒤집힌다. 갱신이 객단가를 올리고, 올라간 객단가가 다음 갱신을 재원한다. 코로나 이전보다 1인당 매출이 50% 넘게 늘었다는 숫자가 그 순환의 증거다.
| 도쿄 디즈니 리조트 | 2019년 3월기 (입장객 사상 최고) | 2026년 3월기 | 변화 |
|---|---|---|---|
| 입장객 | 3,256만 명 | 2,753만 명 | -15% |
| 1인당 매출 | 11,815엔 | 18,403엔 (사상 최고) | +56% |
| 1일권 최고가 | 7,400엔 | 10,900엔 (2026년 10월부터 12,400엔) | +47% (+68%) |
사람은 15% 덜 왔는데 1인당 56%를 더 썼다. 사람을 더 모으는 게 아니라 온 사람에게 더 받는 단계로 넘어간 것이고, 그 가격 결정력의 원천이 3조 원짜리 갱신이다. 롯데월드와 에버랜드에는 이 표의 오른쪽 칸으로 넘어갈 계단이 없다.
한 가지 덧붙이면, 도쿄 디즈니를 소유하고 운영하는 오리엔탈랜드는 디즈니의 자회사가 아니라 게이세이전철이 최대주주(약 20%)인 일본 기업이고, 디즈니는 라이선스 권리 외에 소유권도 지분도 갖고 있지 않다. 일본 자본이 리스크를 전부 지고 미국 브랜드를 빌려온 구조다. 그리고 이것이 화성에서 19년째 성사되지 않은 바로 그 일이다. IP는 유니버설도 파라마운트도 빌려줄 수 있다. 없었던 것은 그 리스크를 통째로 떠안을 주체였다.
5. 경계선의 정체 - 실어 보낼 수 있는가
산업 단위로 저주가 갈린다면, 그 경계선은 무엇인가.
한국의 국가 통계에 이미 답이 찍혀 있다. 제조업 1인당 노동생산성은 OECD 6위로 평균의 122%인데, 서비스업은 27위로 평균의 68.9%다. 서비스업 생산성은 제조업의 49.4%로, 아일랜드를 빼면 OECD에서 격차가 가장 크다.
같은 나라, 같은 교육 수준, 같은 노동력이다. 두 부문이 정반대 성적을 낸다면 원인은 역량이 아니다.
경계선은 실어 보낼 수 있는가다.
화장품은 배에 실린다. 그래서 2025년 수출 114억 달러로 미국을 제치고 세계 2위가 됐고, 놀라운 건 중소기업 수출 비중이 5년 전 55%에서 69.8%로 올랐다는 점이다. 선점자가 후발 진입을 막지 못한다. 시장이 세계이므로 잔여 수요가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선크림은 더 선명하다. 실내에서도 겨울에도 바르는 유별난 내수에서 출발했는데, 그 내수가 천장이 아니라 시험대가 됐다. 검증된 제품이 곧바로 국경을 넘었다. 같은 ‘강한 내수’가 교역재에서는 발판이 되고 비교역재에서는 천장이 된다.
놀이공원은 실을 수 없다. 고객이 와야 한다. 그런데 도쿄 디즈니는 옮길 수 없는데도 세계 수요를 흡수했다. 사람을 오게 만들어서 비교역재를 교역재로 바꾼 것이다.
이것이 이 글의 축이다. 저주의 입구는 ‘먼저 지었는가’가 아니라 ‘수요 풀이 국경에서 닫히는가’다.
6. 저주의 세 얼굴 - 못 들어오고, 못 고치고, 안에서 뺏는다
이 축을 들고 한국 산업을 훑으면 같은 구조가 세 가지 얼굴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셋은 나란히 놓인 사례가 아니다. 앞의 것이 뒤의 것을 낳는 순서다.
첫째, 문을 열어줘도 안 들어온다
통신은 22년간 3사 과점이 유지되는 동안 신규 사업자 유치가 여덟 번 실패했다. 마지막 시도에서 정부는 허가제를 등록제로 바꾸고 정책금융 4,000억 원, 28㎓ 주파수 독점 제공, 경매 최저가 인하까지 붙였는데, 스테이지엑스는 자본금조차 납입하지 못해 취소됐다.
| 차수 | 연도 | 도전자 | 무너진 지점 |
|---|---|---|---|
| 1~2차 | 2010~2011 | KMI | 주주 재무 불확실, 자금조달 계획 실현 가능성 부족 |
| 3차 | 2011 | KMI, IST | IST는 컨소시엄의 현대그룹이 투자 철회 |
| 4차 | 2013 | KMI, IST | 사업계획 심사 기준 미달 |
| 5~6차 | 2014 | KMI | 보증보험 제출 지연, 재정 능력 점수 미달 |
| 7차 | 2015 | 세종텔레콤, 퀀텀모바일, K모바일 | 세 곳 모두 기준 미달 |
| 8차 | 2023~2024 | 스테이지엑스 | 자본금 2,050억 원 미납으로 선정 취소 |
출처: 아주경제
여덟 번의 실패 사유를 한 줄로 줄이면 전부 같은 말이다. 돈을 못 모았다.
금융도 판박이다. 4대 금융지주 상반기 순익이 11조 원을 넘어 역대 최대인 시장인데, 제4인터넷은행은 소호은행·소소뱅크·포도뱅크·AMZ뱅크 후보 4곳이 전원 탈락했고 네 곳 모두 자금조달 안정성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두 번 다 무너진 지점이 규제가 아니라 자본이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정부는 문을 열었는데 들어올 사람이 돈을 모으지 못했다. 왜 못 모았나. 투자자 눈에 회수 계산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5,100만을 셋이 나눈 뒤 남은 몫으로는 망을 깔 수도, 은행을 세울 수도 없다.
그러니 진입장벽의 정체는 규제가 아니라 남은 시장의 크기다. 규제를 더 풀어도 결과는 같다. 놀이공원에서 본 것과 똑같은 구조이고, 여기서는 그것이 여덟 번과 네 곳이라는 숫자로 증명됐을 뿐이다.
둘째, 아무도 안 들어오니 있는 것도 안 고쳐진다
진입 압력이 사라지면 다음에 벌어질 일은 정해져 있다. 기존 사업자가 갱신할 이유를 잃는다.
지상파는 광고매출이 1년 만에 23% 급감해 1조 원이 처음 무너졌고 KBS 881억, SBS 259억 영업손실을 냈다. 문제는 적자 자체가 아니라 그다음이다. 사업자당 평균 제작비가 472억에서 396억으로 줄었다. 콘텐츠로 경쟁하는 산업에서 제작비를 줄인다는 것은 갱신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대학은 더 극단적이다. 입학 가능 인원이 2021년 43만 명에서 2040년 28만 명으로 급감하는데 4년제 190여 개, 전문대 130여 개로 대학 수는 거의 줄지 않았고 2000년 이후 폐교는 22곳뿐이다.
수요가 35% 줄어드는데 공급 시설이 그대로면 산술적으로 결말은 하나다. 모두가 조금씩 덜 채우고, 모두가 조금씩 더 부실해진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아무도 나가지 않는 시장에서는 전부 같이 낡는 것 말고 다른 결말이 없다.
셋째, 갱신을 못 하니 성장할 길이 남의 몫뿐이다
갱신으로 파이를 키우지 못하는 사업자에게 남는 성장 경로는 하나다.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는 수요를 가져오는 것이다.
병원이 전형이다. 빅5를 포함한 대학병원들이 송도·청라·시흥·남양주·과천·하남·김포·안산 등지에 분원을 추진해, 2028년이면 수도권 병상이 6,600개 넘게 늘어날 전망이다. 실제로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런데 빅5를 찾은 비수도권 환자가 2년 만에 11.8% 늘어 수도권 증가율의 2.5배였다. 확장의 결과가 새 환자 창출이 아니라 지방 환자의 이동이다. 국가 전체 의료 수요는 그대로인 채 지방 의료만 무너진다.
항공은 같은 일이 국경에서 벌어진 경우다. 합병 후 국내 여객 점유율은 67.13%로 올랐는데, 인천공항 이용객은 역대 최고인 반면 환승률은 10.9%로 개항 이후 처음 10%대로 추락했다. 2013년 18.7%까지 올랐던 환승률이 개항 당시(11.4%)보다도 낮아진 것이다. 환승객은 한국에 볼일이 없는데도 한국에서 돈을 쓰고 가는 승객이라, 공항이라는 비교역재를 교역재로 바꿔주는 유일한 손님이다. 그 손님이 줄고 국내 점유율만 올랐다는 것은 합병으로 만든 규모가 세계 확장이 아니라 내수 방어에 쓰였다는 뜻이다.
금융은 이 유형의 가장 교묘한 형태를 보여준다. 해외 점포는 211개로 늘었는데 해외 수익의 84.4%가 이자이익이고 비이자이익은 15.6%에 그친다. JP모건과 씨티가 글로벌 결제망으로 다국적 기업의 자금 흐름 자체를 장악하는 것과 대비된다. 점포는 국경을 넘었는데 사업 모델은 넘지 않았으니, 세계 시장에 진입한 것이 아니라 작은 내수를 여러 개 만든 것에 가깝다. 교역재화는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모델의 전환인데, 그 전환이 없으면 아무리 멀리 나가도 하던 일을 반복하게 된다.
셋의 공통점은 하나다. 수요 풀 밖에서 끌어오면 선순환이고, 안에서 빨아들이면 제로섬이다. 도쿄 디즈니의 확장이 아시아 전역에서 새 방문객을 데려온 것과 정확히 반대 방향이다.
그리고 셋은 하나의 회로다
세 얼굴은 서로 다른 병이 아니다. 새 사업자가 못 들어오니 기존 사업자가 갱신 압력을 받지 않고, 갱신을 안 하니 파이가 커지지 않고, 파이가 안 커지니 성장하려면 남의 몫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의 몫을 가져오는 데 성공한 사업자는 시장을 더 굳게 틀어쥐어 다음 진입자를 다시 막는다.
| 얼굴 | 산업 | 결정적 숫자 | 다음 얼굴로 넘기는 것 |
|---|---|---|---|
| 못 들어온다 | 통신, 인터넷은행 | 제4이통 8전 8패, 제4인뱅 후보 4곳 전원 탈락 | 갱신 압력이 사라진다 |
| 못 고친다 | 지상파, 대학 | 사업자당 제작비 472억 → 396억, 입학 가능 인원 43만 → 28만인데 폐교는 22곳 | 파이가 커지지 않는다 |
| 안에서 뺏는다 | 병원, 항공, 금융 | 빅5 비수도권 환자 +11.8%, 인천공항 환승률 10.9%, 해외 수익의 84.4%가 이자 | 시장이 굳어 다시 진입을 막는다 |
한 바퀴 돌 때마다 시장은 더 잘게 나뉘고, 나뉠수록 아무도 임계 규모에 닿지 못한다. 놀이공원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통신과 대학과 병원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7. 전력이 보여주는 것 - 저주는 점이 아니라 선에서 터진다
전력은 이 저주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는 곳이고, 여기서 새로운 사실이 하나 드러난다.
한전 부채는 205조 원이고, 이 상태로는 전력망 확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진단이 나온다. 수조 원 흑자를 내도 부채가 줄지 않는 구조라 영업이익이 갱신 투자로 넘어가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앞서 본 회로와 같다.
그런데 그다음이 다르다. 동해안 발전소들은 송전망 병목 때문에 가동하지 못한 채 유지·관리 비용만 계속 부담하고 있다. 전기는 충분한데 보내지 못하는 상태다.
규모가 작지 않다. 동해안권 발전 제약은 2022년 2GW에서 2025년 7GW로 불어나, 동해안 발전설비 18GW의 약 40%가 놀고 있다. 삼척블루파워(2.1GW)와 강릉안인(2.1GW) 같은 신규 석탄발전소는 조 단위 돈을 들여 지어놓고 가동률이 10%에도 못 미친다. 선이 늦어진 이력은 이렇다.
| 송전선로 | 당초 준공 목표 | 실제 | 지연 |
|---|---|---|---|
| 345kV 북당진~신탕정 | 2012년 6월 | 2024년 11월 준공 | 150개월 (사업 시작부터 21년) |
| 500kV 동해안~수도권 HVDC | 2019년 12월 | 1단계 2026년 10월, 2단계 2027년 목표 | 7년 이상 |
발전소를 지을 돈은 있었는데 연결할 돈이 없었던 것이다. 점에만 투자하고 선을 빠뜨리면, 이미 지어놓은 점들이 전부 무용지물이 된다. 인프라의 저주는 시설이 낡아서만 터지는 게 아니라, 시설과 시설 사이가 비어 있어서도 터진다.
그리고 그 병목은 새 수요까지 막는다. 용인 지역 공급량은 1.9GW인데 반도체 클러스터 가동 시 15~16GW가 필요해 8배 격차가 나고, 변전소 부족과 송전선로 경과지 갈등이 구조적으로 남아 있다. 세계 시장을 목표로 한 교역재 산업이 비교역재 인프라의 저주에 발목을 잡히는 그림이다.
더구나 한국은 계통이 고립돼 남는 전기를 팔 수도, 모자랄 때 살 수도 없다. 유럽에서 전력은 국가 간 계통연계로 사실상 교역재지만, 한국에서 전력은 순수한 비교역재다. 축은 여기서도 그대로 작동한다.
8. 유일하게 뚫린 곳, 그리고 규제가 한 일
지금까지 본 산업은 전부 선점자가 버티고 있다. 딱 하나 예외가 있다. 유통이다.
대형마트 3사 점포는 393개로 줄었고 홈플러스는 회생 절차에 들어가 37개를 폐점했다. 3사 합산 매출이 28조 원에서 정체된 사이 쿠팡은 31.8조에서 41.3조로 뛰었다. 선점자가 점포를 줄이는 동안 후발주자는 물류센터를 늘렸다.
| 2023 | 2024 | 2025 | |
|---|---|---|---|
| 대형마트 3사 합산 매출 | 28조 3,400억 원 | 28조 6,200억 원 (+1%) | - |
| 쿠팡 매출 | 31조 8,300억 원 | 41조 2,900억 원 (+30%) | 49조 1,197억 원 (+19%) |
그 결과 전체 유통업 매출에서 대형마트 비중은 2021년 15.1%에서 2025년 9.8%로 처음 한 자릿수가 됐고, 온라인은 59.0%가 됐다. 축소 균형과 확장 선순환이 같은 시장에서 정면으로 갈린 것이다.
왜 여기서만 뚫렸나. 후발주자가 선점자의 진입장벽인 부지 자체를 무력화했기 때문이다. 놀이공원과 병원과 발전소는 땅에 묶여 있어 선점자의 입지가 곧 장벽이지만, 온라인은 그 장벽 밖에서 같은 수요에 접근했다.
즉 저주는 영구적이지 않다. 물리적 제약을 우회하는 기술이 등장할 때 깨진다. 뒤집어 말하면, 우회로가 원리적으로 없는 산업에서는 계속된다.
그리고 여기서 규제에 대한 가장 불편한 교훈이 나온다. 의무휴업일에도 쿠팡과 네이버와 컬리는 24시간 주문을 받고, 마트만 온라인 배송까지 함께 막힌다. 마트가 쉬는 날 소비자가 찾는 곳은 전통시장이 아니라 온라인 플랫폼이었다.
2012년에 도입한 규제가 보호하려던 대상은 전통시장이었다. 실제로 키운 것은 쿠팡이었다. 선점자를 묶는 규제는 보호 대상에게 수요를 보내지 않고, 규제 언어 밖에 있는 새 형태로 흘려보낸다.
같은 실패가 다른 곳에서도 반복됐다. 인스파이어는 총사업비 6조 원짜리 계획의 1단계에만 16억 달러, 2조 원이 넘는 돈을 들여 지었는데 2024회계연도 매출 2,190억 원에 영업손실 1,564억, 순손실 2,654억을 냈고 경영권이 베인캐피털로 넘어갔다. 매출 절반이 외국인 카지노에서 나왔는데 그 카지노 매출이 1,079억 원으로, 기존 파라다이스시티의 4,100억 원에 한참 못 미쳤다.
| 파라다이스시티 (선점자) | 인스파이어 (신규 진입자) | |
|---|---|---|
| 개장 | 2017년 | 2023년 11월 |
| 투자 | 약 1조 4,000억 원 | 1단계 2조 원대 (총계획 6조 원) |
| 외국인 카지노 매출 | 약 4,100억 원 (2024년) | 1,079억 원 (2023.10~2024.9) |
| 투자 1원당 카지노 매출 | 약 0.29원 | 약 0.05원 |
더 큰돈을 넣은 신규 진입자가 카지노 매출에서 선점자의 4분의 1에 그친 것이다.
반면 싱가포르는 마리나베이샌즈 개장 후 관광객이 2배로 늘고 연 관광수입이 11조 원 증가했다. 같은 복합리조트 모델인데 결과가 갈린 이유는 시설 품질이 아니다. 접근할 수 있는 수요의 크기다. 한국은 내국인 출입 제한으로 수요 풀을 스스로 잘라놓은 채, 사라진 중국 단체관광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규모를 키워도 수요 풀이 제도로 막혀 있으면 저주를 못 벗어난다. 이것이 인스파이어가 증명한 것이다.
9. 도쿄 디즈니와 코레일 - 같은 독점, 다른 결말
이 글에서 가장 선명한 대비는 놀이공원 둘이 아니라, 놀이공원 하나와 철도 하나 사이에 있다.
코레일 누적 부채는 21조 원이고, KTX 요금은 2011년 이후 15년째 동결이다. KTX-1 교체는 지원 대상이 아니어서 비용을 자체 조달해야 한다. 철도 운송에서만 3,621억 원 적자가 나고 수탁사업 흑자로도 메우지 못한다.
여기에 인구구조가 자동 장치처럼 얹힌다. 무임수송이 서울교통공사 영업손실의 68%, 부산교통공사의 73%를 차지한다.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적자가 자동으로 늘고, 그만큼 노후 차량 교체 재원이 줄어든다.
이제 둘을 나란히 놓아보자. 도쿄 디즈니와 코레일은 둘 다 사실상 독점이다. 한쪽은 객단가를 올려 3조 원을 재투자했고, 다른 쪽은 요금이 15년 묶인 채 21조 원의 빚을 졌다.
| 도쿄 디즈니 (오리엔탈랜드) | 코레일 | |
|---|---|---|
| 시장 지위 | 사실상 독점 | 사실상 독점 |
| 2011년 이후 가격 | 1일권 6,200엔 → 2026년 10월 최고 12,400엔 (2배) | KTX 요금 동결 (0%) |
| 갱신 투자 | 미녀와 야수 구역 750억 엔 (2020), 판타지 스프링스 3,200억 엔 (2024) | KTX-1 교체는 지원 대상 아님, 자체 조달 |
| 재무 | 영업이익 1,684억 엔 | 누적 부채 21조 원, 철도 운송 3,621억 원 적자 |
| 가격을 정하는 곳 | 회사 (디즈니와의 라이선스 계약이 재투자를 규율) | 정부 (정치적 결정) |
같은 15년 동안 한쪽은 가격을 두 배로 올리고 그 돈으로 새 구역을 두 번 지었고, 다른 쪽은 가격을 한 번도 못 올리고 낡은 차량 교체비를 스스로 구해야 했다.
그러니까 문제는 독점이 아니었다. 독점에게 갱신 의무와 갱신 재원을 동시에 주었느냐가 갈랐다. 오리엔탈랜드에는 디즈니 본사와의 라이선스 계약이라는 외부 규율이 있었고, 가격을 올릴 자유도 있었다. 코레일에는 갱신 의무만 있고 재원은 없다.
한국 비교역재 산업 대부분이 코레일 쪽에 서 있다. 규제로 가격과 영업을 묶어두고, 그 대가로 갱신 재원을 만들 길은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시설이 낡으면 경영을 탓했다.
6장의 회로와 4장에서 본 도쿄의 순환을 이 조건 위에 나란히 놓으면, 둘은 같은 독점에서 출발해 반대 방향으로 돈다.
10.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진단에서 나오는 처방은 “기존 것을 잘 고치자”가 아니다. 그건 이미 실패한 답이다.
첫째, 무엇을 버릴지 정해야 한다. 전부 유지는 재정적으로 불가능하다. 선별 유지와 계획적 폐기를 명시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예산은 자동으로 ‘전부 조금씩 낡히기’에 배분된다. 대학 320여 개를 다 살리려다 전부 부실해지는 것이 지금 벌어지는 일이다. 결정하지 않는 것도 결정이며, 가장 나쁜 결정이다.
둘째, 점이 아니라 선에 투자해야 한다. 발전소를 더 짓는 것보다 송전망을 잇는 것이 급하다. 이미 지어놓은 자산이 연결되지 않아 놀고 있다면, 새 자산을 추가해도 같은 자리에서 멈춘다. 여기서 걷어야 할 곳과 줄 곳도 분명하다. 송전선로가 지나는 지역이 부담을 지고 전력을 쓰는 수도권 산업단지가 이익을 가져가는 구조라면, 그 이익의 일부가 경과지로 되돌아가는 설계 없이는 갈등이 끝나지 않는다.
셋째, 선점자를 묶는 대신 신규 진입자에게 규모를 몰아줘야 한다. 마트 규제는 전통시장을 살리지 못했고, 카지노 내국인 규제는 인스파이어를 죽였고, 병상 규제는 지방 의료를 살리지 못했다. 셋 다 “기존 것을 묶어 약자를 보호한다”는 같은 논리였고 셋 다 실패했다. 잔여 시장이 저절로 커지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부지와 교통을 국가가 먼저 공급해 임계 규모를 만들어줘야 한다. 재원은 기존 시설이 입지 독점으로 얻은 지대에서 걷는 것이 형평에 맞다.
넷째, 독점을 허용할 거라면 갱신 의무와 갱신 재원을 함께 줘야 한다. 오리엔탈랜드에게 라이선스 계약이 했던 역할을, 한국에서는 규제가 대신할 수 있다. 요금을 정치적으로 동결하는 대신 갱신 계획과 연동해 조정하고, 그 대가로 주기적 재투자를 의무화하는 것이다. 계약이 경쟁을 대신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11. 청구서는 이미 발송됐다
이 저주의 최종 청구서는 관광 통계에 찍혀 있다.
2025년 방한 외래객은 1,894만 명인데 일본은 상반기에만 2,151만 명을 받았다. 일본은 반년에 한국의 1년치를 넘긴다. 그리고 일본 인바운드 1위 국가가 한국(478만 명)이고, 양국 격차는 2019년 231만 명에서 2025년 581만 명으로 2배 이상 벌어졌다.
| 2019 | 2025 | 변화 | |
|---|---|---|---|
| 한국을 찾은 외국인 | 1,750만 | 1,894만 | +8% |
| 일본을 찾은 외국인 | 3,188만 | 4,268만 | +34% |
| 일본에 간 한국인 | 558만 | 946만 | +70% |
| 한국에 온 일본인 | 327만 | 365만 | +12% |
| 상호 방문 격차 | 231만 | 581만 | 2.5배 |
2025년 한 해에만 한국인 946만 명이 일본으로 갔다. 에버랜드와 롯데월드 방문객을 합친 1,090만 명에 육박하는 숫자다. 6년 사이 일본에 간 한국인은 70% 늘었는데, 한국에 온 일본인은 12% 느는 데 그쳤다.
한국인이 낸 돈이 판타지 스프링스 같은 일본의 갱신 투자를 재원하고, 그 갱신이 다시 한국인을 부른다. 순환은 이미 완성돼 있다.
우리는 흔히 한국이 선진국 문턱에서 성장이 멈췄다고 말한다. 정확하지 않다. 한국은 실어 보낼 수 있는 것에서는 이미 선진국이고, 실어 보낼 수 없는 것에서는 아직 5,100만 명짜리 나라다. 반도체와 화장품은 세계에서 경쟁하는데, 통신과 대학과 철도와 놀이공원은 5,100만을 나눠 갖는 게임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5,100만이 줄기 시작했다. 지금 내수 서비스업이 겪는 것은 불황이 아니다. 만기 도래다.
화성 송산면의 그 땅은 지금도 비어 있다. 19년 동안 아무도 짓지 않은 이유는 그 땅에 사람이 안 와서가 아니라, 올 사람의 절반이 이미 다른 곳에 가 있고 그 다른 곳도 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어정쩡해진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덧붙임 - 에버랜드는 왜 끝내 짓지 않았나
에버랜드는 오랫동안 놀이공원이 아니었다.
1996년 삼성에버랜드는 전환사채를 주당 7,700원에 발행했고, 기존 주주인 삼성 계열사들이 일제히 인수를 포기한 자리를 이재용이 받아 지분 25.6%의 최대주주가 됐다. 이로써 에버랜드는 에버랜드 → 삼성생명 → 삼성카드 → 삼성전자 → 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의 정점이 됐다.
그 순간부터 이 회사의 가치는 놀이기구에서 나오지 않았다. 삼성생명 지분에서 나왔다. 놀이공원은 그 지분을 담아둔 그릇의 겉면이었을 뿐이다.
여기서 불편한 구조가 하나 생긴다. 승계 비용을 낮추려면 그릇의 값이 싸야 한다. 전환사채를 7,700원에 발행하는 일이 정당화되려면 회사의 가치 평가가 높지 않아야 했고, 비상장사였기에 그 평가는 바깥의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 시기에 놀이공원 실적을 끌어올릴 유인이 회사 안에 강하게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 대목은 정황에 기댄 해석이다. 다만 유인의 방향이 어디를 향했는지는 구조만 봐도 읽힌다.
그다음은 사업부가 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에버랜드는 2014년 제일모직으로 이름을 바꾸고 2015년 삼성물산과 합쳤다. 놀이공원은 그때부터 삼성물산 리조트부문의 한 사업이 됐다.
이 변화가 결정적이다. 그룹의 한 사업부가 되면 자본을 받기 위해 같은 그룹의 다른 사업과 겨뤄야 한다. 상대가 반도체와 바이오와 건설이다. 3조 원이 있을 때 놀이기구에 넣을 것인가 반도체에 넣을 것인가 - 이 질문에서 놀이공원이 이길 방법은 없다.
숫자가 그대로 보여준다. 2025년 삼성물산 리조트부문 매출은 3조 9,870억 원, 영업이익은 1,710억 원으로 전년보다 440억 원 줄었다. 삼성물산 전체 영업이익 3조 2,930억 원의 5.2%다. 게다가 그 매출 증가분은 급식·식자재 사업 확대에서 나왔고 레저 수요는 오히려 감소했다. 놀이공원은 리조트부문 안에서도 성장을 이끄는 쪽이 아니었다.
같은 해 오리엔탈랜드의 영업이익은 1,684억 엔, 약 1조 7,000억 원이다. 숫자만 보면 열 배 차이지만, 진짜 차이는 그 돈의 용처에 있다. 오리엔탈랜드는 테마파크가 회사의 전부라 그 이익을 파크에 쓰는 것 말고 성장할 방법이 없다. 삼성물산은 그 1,710억이 전체의 5%라 어디에 써도 된다.
| 오리엔탈랜드 | 삼성물산 리조트부문 | |
|---|---|---|
| 매출 | 7,045억 엔 (2026년 3월기) | 3조 9,870억 원 (2025년) |
| 영업이익 | 1,684억 엔 | 1,710억 원 (전년 대비 -440억 원) |
| 회사 안에서의 무게 | 테마파크 사업이 영업이익의 77% (1,304억 엔) | 삼성물산 전체 영업이익의 5.2% |
| 성장을 끈 것 | 테마파크 1인당 매출 18,403엔 (사상 최고) | 급식·식자재 확대 (레저 수요는 감소) |
| 가장 최근 대형 투자 | 판타지 스프링스 3,200억 엔 (2024) | 대형 스릴 어트랙션은 2008년 티익스프레스가 마지막 |
전업 사업자에게 재투자는 생존이고, 대기업 사업부에게 재투자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다. 그리고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되는 순간, 놀이공원은 늘 진다.
결과는 시설에 그대로 남았다. 대형 스릴 어트랙션 중 가장 최근 것이 2008년 티익스프레스다. 18년이 지났다. 최초의 다크라이드였던 지구마을, 최초의 서스펜디드 코스터였던 독수리요새, 우주관람차는 노후로 운행을 멈췄고 둘은 철거됐다. 2026년이 개장 50주년인데, 새 롤러코스터 도입설에 대해 회사는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계획한 적은 없다”고 답했다.
같은 25년을 도쿄 디즈니와 나란히 놓으면 이렇다.
| 연도 | 도쿄 디즈니 리조트 | 에버랜드 |
|---|---|---|
| 2001 | 도쿄 디즈니씨 개장 (3,350억 엔) | |
| 2008 | 티익스프레스 개장 (마지막 대형 스릴 어트랙션) | |
| 2016 | 판다월드 개장 (40주년) | |
| 2020 | 미녀와 야수 구역 개장 (750억 엔, 도쿄 디즈니랜드 사상 최대 개발) | |
| 2024 | 판타지 스프링스 개장 (3,200억 엔, 디즈니씨 이후 최대 개발) | |
| 2026 | 1일권 최고가 12,400엔으로 인상 (10월) | 개장 50주년, 신규 코스터는 “계획한 적 없다” |
도쿄 디즈니는 2020년대에만 4,000억 엔 가까이를 갱신에 넣었다. 에버랜드의 시계는 2008년에 멈춰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확인하기 어려운, 그러나 아마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가 하나 남는다.
오너가 그 공간을 사랑하는가.
오리엔탈랜드는 게이세이전철과 미쓰이부동산이 도쿄만 매립지를 살리려고 만든 회사다. 그들에게 파크는 회사의 얼굴이자 존재 이유였다. 반면 삼성에서 에버랜드는 오랫동안 승계의 통로였고, 지금은 5% 사업부다. 그룹을 이끄는 이들의 성장 배경과 관심이 반도체와 글로벌 금융 쪽에 놓여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건 검증할 수 없는 영역이라 단정하지 않겠다. 다만 경영은 숫자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회수율이 안 나오는 투자를 그럼에도 밀어붙이게 만드는 것은 대개 계산이 아니라 애착이거나 자존심이다. 오리엔탈랜드에는 그것을 대신하는 장치가 있었다. 디즈니와의 라이선스 계약이 재투자를 계약 조건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에버랜드에는 계산도 애착도, 그것을 대신할 계약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반사실적 질문 하나.
롯데월드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수도권 수요가 갈리지 않고 에버랜드 한 곳으로 몰렸다면 연 1,000만 명대가 가능했을 것이고, 그 규모라면 3조 원짜리 투자의 회수 계산이 달라졌을 수 있다. 임계 규모를 넘긴 사업자는 갱신할 이유가 생기고, 갱신하면 객단가가 오르고, 오른 객단가가 다음 갱신을 부른다. 도쿄에서 벌어진 그 순환이다.
물론 이건 가정이다. 롯데월드가 없었다면 에버랜드가 잘했으리라는 보장은 없고, 위에서 본 지배구조와 자본 배분의 문제는 경쟁자 유무와 무관하게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한국 수도권은 세계급 테마파크 하나를 먹여 살릴 만한 시장이었다. 다만 그 시장이 처음부터 둘로 나뉘었고, 나뉜 둘 중 어느 쪽도 세계급이 될 규모에 닿지 못했다. 본문에서 말한 저주가 이것이고, 이 덧붙임은 그 저주가 한 회사 안에서 어떤 얼굴로 나타났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