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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일수록 왜 더 쉽게 무너지는가

착한 사람은 왜 더 쉽게 무너질까. 이상하게도 이유는 그들이 덜 강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남의 말에는 의미를 붙이고, 자기 욕망에는 죄책감을 붙이고, 견디기 힘든 고생에는 "그래도 참아야 한다"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게 마음속에 의미가 너무 많아지면 사람은 선해서 무너지는 게 아니라, 선함을 잘못 운용해서 무너진다. 이 글은 그 지점을 파고든다. 의미는 언제 힘이 되고 언제 독이 되는가. 욕망은 왜 누를수록 더 질기게 돌아오는가. 공포와 고생은 어떤 조건에서 사람을 망가뜨리고, 어떤 조건에서 오히려 사람을 키우는가. 결론은 단순하지 않다. 착한 사람이 살아남으려면 더 독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욕망과 공포를 자기 편으로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

1. 인간은 의미의 동물이다 - 그래서 의미는 붙였다 뗄 수 있어야 한다

열정을 일으키려면 의미를 부여하고, 상처받지 않으려면 의미를 지워야 한다. 자기관리의 절반은 이 두 동작에서 나온다.

먼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자. 인간은 이야기의 동물이다. 애니메이션이 좋은 증거다. 별것 아닌 그림 한 장에 어떤 의미를 입히느냐에 따라 감동의 크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해설가가 하는 일도 본질이 같다. 사소한 플레이 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관중을 열광시킨다. 작은 것에도 가슴 설레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 열정을 만든다. 달이 그토록 아름다운 이유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 닿지 못한다는 사실에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의미 부여가 강력한 까닭은, 사람이 무언가를 공식적이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면 그것을 달성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간 매일 30분씩 운동하면 주말에 논다”고 적어 두면 사람은 그 기록을 채우려 움직이고, 나중에는 보상이 없어도 그 운동을 이어 간다. 같은 게임이라도 전적을 공식적으로 기록하고 등급화하는 쪽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압도적으로 중독성이 강한 것도 같은 이치다. 기록은 의미를 만들고, 의미는 열정을 강화한다. 그리고 사람은 희망의 동물이라,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곧 희망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람은 희망이 사라지면 아픔을 고문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의미 부여의 어두운 증거가 분노와 증오다. 칭찬은 지속적인 피드백이 끊기면 식지만, 분노는 스스로 부여한 의미를 연료로 외부 보상 없이도 타오른다. 그래서 분노와 증오는 칭찬이나 감사보다 끈질긴 열정이다.

이제 반대 동작, 의미를 지운다는 것을 보자. 누군가 나에게 “개새끼”라고 외쳐도 내가 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일어난 일은 공기의 진동뿐이고, 사실관계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2000년 전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같은 진단을 남겼다. 인간을 동요시키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판단이라고. 그러니 악플 같은 소음에서 의미를 지울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평온하다. 데이터에서는 의미를 찾고, 소음에서는 의미를 지우는 것 - 이것이 사실에 민감하고 의견에 둔감해진다는 말의 실체다.

의미를 지우는 데에는 연습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술이 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불만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최대한 구체적으로 글로 적어 비워 내는 것이다. (불만을 글로 적다보면 자연스럽게 머리속에서 잊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를 좋은 기억으로 덮어씌운다. 같은 현상에 새로운 의미를 찾아 붙여 보고, 우주라는 공간의 스케일이나 역사라는 시간의 스케일로 끌어올려 작게 만들어 본다. 혹은 더 중요한 일에 몰입해 밀어내는 방법도 좋다. 의미를 지우면 같은 현상에서 새로운 의미가 떠오르기 때문에, 같은 일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였던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꿈이 되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예를 들어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신재경은 딸 곁을 지키는 대신 앵커석을 지키기로 한 9시 뉴스 메인 앵커다. 그 선택은 딸 희도에게는 차갑고 무심한 엄마로 남아 증오가 되지만, 같은 모습이 방송국 후배들에게는 흔들림 없는 프로페셔널, 닮고 싶은 롤모델이 된다. 같은 엄마의 같은 선택이 한쪽에서는 배신으로, 다른 쪽에서는 존경으로 읽히는 것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 딸 나희도(김태리)와 엄마 신재경(서재희)의 대치

의미를 지우는 일의 또 다른 방법은, 사실이라고 믿는 것조차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격자 위에 분명히 열두 개의 검은 점이 찍혀 있는데도 우리 뇌는 한 번에 하나씩밖에 보지 못한다.

격자의 교차점마다 검은 점이 열두 개 있지만 한 번에 모두 볼 수 없는 착시

보는 것조차 이렇게 불완전하다. 같은 그림을 두고도 마음 상태에 따라 가운데가 더 일렁여 보이는 착시까지 있을 만큼, 우리의 지각은 마음에 쉽게 휘둘리며, 내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조차 사실이 아닐 수 있다.

회색 점으로 채워진 면이 응시할수록 가운데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 스크롤을 움직이면 더 확실히 보임

내가 확신하는 그 “사실”도 착시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의미는 한결 가벼워진다.

그래서 의미를 자유자재로 붙이고 지우는 사람이 곧 리더다. 소설가는 의미를 만들고 지우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고, 리더는 소설가이자 연기자다. 구성원에게 의미를 부여해 열정을 일으키고, 불필요한 의미를 지워 평온을 지키며, 동시에 감정을 조정하여 그것을 완벽하게 전달하는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 이처럼 열정과 희망을 관리한다는 것은 결국 의미를 부여하고 지우는 일에 능숙해진다는 뜻이다.

2. 후회·걱정·분노·부담은 시제와 주어만 다른 하나의 감정이다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고 지우는 가장 중요한 예가 바로 후회와 걱정과 분노와 부담이다. 이는 서로 다른 감정처럼 보이지만, 실은 주어와 시제만 다른 하나의 감정이다. 그러하기에 손쉽게 변환(의미를 부여하고 지움)할 수 있다.

먼저 짚을 것이 있다. 착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 감정들에 쉽게 잡아먹힌다. 우울증은 원하는 것을 모두 표출하며 악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오지 않는다. 너무 착해서, 원하는 것을 참고 또 참아서 오는 병이다. 자책과 걱정이 많은 것도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학습된 습관이다. 희생자가 약탈자에게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내보여 관용을 구걸하던 행동이, 감정으로 굳어 반복되는 것이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후회가 많은 이유도 같다. 그들에게 행복은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지배당하고, 세상 모든 일을 자기가 해내야 한다고 믿기에 끝없이 후회를 만들어 낸다. 선생님과 종교가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자책·걱정 유발 주체이며, 현대 사회 자체가 이것을 과도하게 부추기는 구조다. “네 성적이 나쁘면 엄마 아빠 마음이 아프단다”라는 말은 아이에게 죄책감을 심어 마음을 움직인다. 사실 아이의 성적 때문에 부모가 아픈 게 아니라 부모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해 아픈 것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어휘는 인류가 오랜시간 동안 노예와 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기에 생기는 부산물이고 그것이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길들이는 방식이다. 즉 “노예는 노예다워야 한다라는 말로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 것이다” 사실 죄라는 건 없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인 것도 원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자책과 걱정에 길들어진 사람은 긍정적 행동 대신 두 가지 도피가 나온다. 바로 걱정은 영웅숭배를 낳고, 자책은 비난을 낳는다. 영웅숭배란 내가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일을 남의 눈을 빌려 자기 가치를 매기며 타인을 나보다 중하게 여기는 것이고, 비난은 그 영웅숭배가 거꾸로 뒤집힌 것이다. 우리가 영웅에게 끌리는 만큼 남을 비난하는 일에도 끌리는 이유다. (대통령등 누군가를 집단적으로 비난하는 행위) 그러나 선진 시민일 수록 이러한 불평과 불안에 빠져 비난과 영웅숭배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완벽이 아니면 소용없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 최선을 다하거나 잘해야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자신의 가치가 일의 성공 여부로 결정된다고 믿는 사람은 결국 자기가 아무 쓸모 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이 감정들의 정체를 정확히 해부하고 어떻게 변환 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핵심은 두 개의 축이다. 하나는 시제 - 과거를 향하는가, 미래를 향하는가. 다른 하나는 주어 - 화살이 나를 겨누는가, 상대를 겨누는가. 이 두 축으로 가르면 네 감정이 정확히 사분면에 떨어진다.

가로축은 과거-미래, 세로축은 나-상대방으로 자책·분노·걱정·부담을 사분면에 배치한 도해

자책(후회,미련)과 걱정은 시제만 다른 같은 감정이다. 자책은 과거에 대한 것이고 걱정은 미래에 대한 것일 뿐. 걱정할 일이 없는 것조차 걱정할 수 있을 만큼, 걱정은 언제나 만들어 낼 수 있다. 분노와 부담 역시 마찬가지로 짝을 이룬다.

이 지도가 중요한 이유는, 네 감정 모두가 건강한 사고에 불필요한 감정이 얹혀 변질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 자책은 성찰에 감정이 얹힌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 자체는 좋다. 원인을 찾아 현재의 해결책과 대책을 세우기 위한 것이니까. 거기서 불필요한 감정만 걷어 내면 자책은 성찰이 된다.
  • 분노는 그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문제의 원인이 저 사람이라고 떠넘긴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약속에 늦었다는 사실 자체는 분노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마침 혼자 30분쯤 느긋하게 있고 싶었다면 그가 늦은 것은 오히려 고마운 일이 된다. 즉 느낌의 원인은 상대의 행동이 아니라 그 순간 나의 욕구다. 폭력은 내 고통의 원인이 저 사람이며 그러므로 그가 처벌받아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 걱정은 계획에 감정이 얹힌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아 예측하고 대비하는 행위는 좋다. 거기서 감정만 걷어 내면 걱정은 계획이 된다.
  • 부담은 그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라고 떠넘긴 것이다.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과 책임을 전가하고 싶은 마음에서 온다.

자책·걱정·분노·부담은 건강한 사고에 감정이 얹혀 변질된 형태라는 도해

그래서 처리법도 분명해진다. 부정적인 감정은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원래 하려던 일로 되돌려야 한다. 자책은 과거를 맴돌게 두면 후회가 되지만, 원인을 찾고 다음 행동을 고치면 성찰이 된다. 걱정은 미래를 붙잡고 떨기만 하면 불안이 되지만, 가능한 경우의 수를 나누고 대응 순서를 정하면 계획이 된다. 분노는 상대를 벌주고 싶은 마음으로 굳어지면 폭력이 되지만, 내 욕구가 어디서 막혔는지 확인하면 문제 인식이 된다. 부담은 모든 책임을 혼자 떠안으면 압박이 되지만, 누가 무엇을 맡아야 하는지 다시 나누면 책임 설계가 된다.

이것이 같은 에너지의 다른 처리다. 같은 재료를 제자리에서 맴돌게 하면 후회와 걱정과 분노와 부담이 되고, 앞으로 움직이게 하면 성찰과 계획과 문제 인식과 책임 설계가 된다. 이 주제는 후회와 성찰이 같은 에너지라는 별도 글에서 더 깊이 다뤘다.

여기까지가 의미를 붙이고 지우는 첫 번째 응용이다. 같은 사건도 어디에 의미를 붙이느냐에 따라 자책·걱정·분노·부담이 되고, 그 의미를 다시 배치하면 성찰·계획·문제 인식·책임 설계가 된다. 즉 감정 설계란 의미 설계다.

3. 욕망은 적이 아니라 동력이다 - 본능에 보상을 연결하라

이제 같은 원리를 욕망으로 옮겨 보자. 욕망 역시 의미를 잘못 붙이면 죄책감과 중독이 되고, 의미를 목표와 보상에 붙이면 동력이 된다. 자기관리를 의지력 싸움으로 보면 반드시 진다. 인간은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프로그래밍된 존재이고, 그 프로그램을 맨손으로 이기려 드는 것은 무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프로그램을 잘 활용하면 인생을 건설적으로 살 수 있다. 욕망은 끊어 낼 적이 아니라 동력으로 쓸 연료다.

핵심은 중독을 올바르게 설계해 동력으로 바꾸는 것이다. (새로운 의미-설계를 부여하는 것) 우리가 무언가에 끌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게임은 쉽게 성취욕을 채워 주고, 야한 영상은 쉽게 욕구를 풀어 주고, 단것은 쉽게 에너지가 된다. 문제는 이 쉬움이 잘못 쓰일 때다 - 게임은 현실의 도전을 멈추게 하고, 영상은 자기 계발을 멈추게 하고, 단것은 건강을 망친다. 경제로 치면 도둑질과 약탈도 같은 구조다. 쉽게 재화를 얻게 해 주지만 모두가 그렇게 하면 사회가 병들기에, 그것을 억제하는 경찰 시스템이 존재한다. 욕망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설계되지 않은 욕망이 나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계하는가. 가장 도발적인 예를 들겠다. 매일 혹은 이삼일 간격으로 야한 영상을 보는 것은 열정과 스태미나를 갉아먹는다. 그래서 최소 일주일, 길게는 한 달의 금욕이 필요하고, 그 금욕을 열정적 에너지로 전환할 방법과 보상이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다만 무제한 금욕은 답이 아니다 - 끝이 없으면 그 에너지를 무언가로 전환할 동기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끊는 게 아니라 당근으로 쓴다. 운동을 꾸준히 해서 정한 목표를 채우면 본다. 그 이상을 해내면 좋아하는 여가를 즐길 수 있고, 초과 달성하면 그만큼 더 큰 여가 비용으로 쓴다. 본능을 통제하기 위한 당근으로 조정만 한다면, 끊어야 할 죄가 아니라 값지게 쓸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같은 원리를 더 크게 쓰면, 퇴근 후의 시간을 회사 잔업이 아니라 돈이 될 역량을 개발하는 데 쓰고 그 노력을 객관적인 보상에 연결할 수도 있다 -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을 객관적 보상으로 명문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의미를 지우는 행동이다.)

이것을 하나의 산출물 프로젝트로 구체화하면 이렇게 된다. 예컨대 퇴근 후 AI를 부려 투자 리서치를 자동으로 돌리는 나만의 도구를 만든다고 하자, 분명한 목적을 향해 작게 쪼개고 과정을 기록하면서, 하루 30분이라도 하루도 쉬지 않고 꾸준히 한다. 그리고 보상을 단계로 설계한다.

  • 노력에 대한 보상 (주기는 짧게): 성과가 없더라도 매일 30분씩 책상 앞에 앉았다면, 비용이 들지 않는 보상(예: 정해진 기간의 휴식)을 준다. 기존에 약간의 죄의식과 함께 누리던 것을 이제 당당한 보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 산출물에 대한 보상 (주기는 보통): 가설 하나를 완성해 도구가 혼자 돌아가게 만들었다면, 본래 그 정도는 쓰려 했던 수준의 금액(한 달 20만~40만 원)을 죄의식 없이 보상으로 집행한다.
  • 성과에 대한 보상 (주기는 길게): 그 도구로 실제 투자를 집행해 100만 원을 벌었다면, 절반인 50만 원을 보상으로 처리한다. 나머지 절반은 성과가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다. 과잉 투자의 데미지를 막기 위해 최대 투자금은 전체 자산의 20%로 제한하고, 손실이 나면 보상도 페널티도 없이 다음엔 다른 산출물로 다시 시도한다.

노력·산출물·성과에 따른 보상 3단계 설계 도해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일정이다. 정확한 평가일과 보상일이 달력에 명기되어야 한다. 노력 보상은 주 단위로 짧게, 산출물 보상은 달 단위로 보통으로, 성과 보상은 분기 단위로 길게 둔다. 측정에 시간이 걸리는 보상일수록 주기도 길게 잡아야 한다. 그래야 보상이 충동의 면죄부가 아니라, 행동을 반복시키는 장치가 된다.

패널티도 같은 방식으로 설계할 수 있다. 게임을 하다 질 때마다 건강식품을 먹기로 정하면, 벌칙조차 욕망을 목표 쪽으로 밀어 주는 장치가 된다. 핵심은 금지가 아니라 조건이다. 하지 말라고 막는 게 아니라, “무엇을 하면 할 수 있어, 이렇게 하면 더 할 수 있어”로 길을 열어 주는 것.

야망이란 결국 욕망이 더해진 목표다. 욕망을 목표와 보상 일정에 연결하는 순간, 참아야 할 본능이 목표를 밀어 주는 엔진으로 바뀐다. 앞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가장 자극적이고 눈에 잘 보이는 욕망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원리는 성욕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같은 원리를 욕망 전체의 위계로 넓혀 보자.

4. 욕망 설계에는 위계가 있다 - 식욕부터 성취욕까지

이제 필요한 것은 욕망의 목록이 아니라 욕망을 다루는 순서다. 욕망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다룰 수 없다. 생존에 가까운 욕구일수록 설계보다 충족이 먼저이고, 상위 욕구로 갈수록 의미와 목표와 보상을 붙여 설계할 수 있다. 그래서 4장의 핵심은 어떤 욕망을 어느 층위에서 다룰 수 있는지 위계를 세우는 것이다.

이 위계는 남과 비교해서 정할 수 없다.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는 것은 자기 욕망 설계가 아니라 남의 보상 체계를 빌려 온다는 뜻이다. “아빠는 네 나이에 버스 타고 다녔다”는 식으로 말할 게 아니라, 왜 그 나이에 버스를 탈 수 있었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붙어 있었고, 어떤 보상이 있었고, 어떤 불편은 견딜 만했는지를 봐야 한다. 부러움과 자랑은 사실 같은 고리다. 부러우니까 자랑하고, 자랑하니까 다시 부러워진다. 욕망 설계는 그 고리에서 빠져나와 자기 기준의 만족을 찾는 일에서 시작한다.

가장 아래에는 설계가 거의 통하지 않는 욕구가 있다. 호흡·수분·배설·수면처럼 생존에 직결된 욕구는 목표와 보상으로 밀어붙일 대상이 아니다. 부족하면 먼저 채워야 한다. 이 층위를 무시하고 상위 욕망을 설계하려 들면, 자기관리가 아니라 학대가 된다.

그 위에 식욕이 있다. 식욕은 동물이나 어린아이에게 가장 먼저 통하는 설계 도구다. 싫어하는 음식을 먹으면 좋아하는 음식을 주는 식으로 쓸 수 있다. 다만 순서가 중요하다. 너무 단 음식이나 중독을 부르는 음식을 초반 보상으로 쓰면, 식욕은 훈련의 도구가 아니라 더 강한 중독의 입구가 된다.

다음은 놀이(장난감·영상·게임)다. 성욕이 생기기 전 아이에게 가장 강력한 동기는 놀이이고, 여기서부터 욕망은 단순한 소비를 넘어 창작과 관계로 확장된다. 핵심은 만들고 나누면 더 즐거워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하는 것이다. 자극적인 영상을 먼저 쓰지 말고, 10분 내외의 시청각 자료에서 시작해, 함께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그다음 아이 혼자 보는 콘텐츠로 단계를 밟는 편이 낫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끝냈을 때 보람이 남는 게임이라면 놀이 설계가 제대로 작동한 것이고, 사행성만 남는 게임이라면 욕망을 빼앗긴 것이다.

그다음이 3장에서 자세히 다룬 이다. 성은 성인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설계 도구다. 오래 금욕하면 답답함과 조급함과 긴장이 쌓이는데, 이것은 사실 열정의 부정적 표현이다. 해소한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해소 뒤에는 나른함과 피곤이 몰려올 뿐, 진정한 행복은 해소가 아니라 열정을 통한 성취에서 온다. 그래서 이 욕망을 돈, 투자, 자동화 코드, 지식, 회사, 매력, 건강, 운동 같은 자기 계발의 사슬에 연결할 수 있다. 다만 여러 개를 한꺼번에 연결할수록 동력이 분산되니 주의해야 한다.

더 위로 올라가면 성취욕이 나온다. 성취욕은 개인의 욕망이 타인과 조직으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재미에서 인정으로, 인정에서 성장으로, 성장에서 성취로 이어진다. 협업 플랫폼은 그 자체로 놀이터가 될 수 있다. 전적은 기여 기록으로 남고, 성장은 자기 영역의 확대로 남으며, 성취는 함께 이룬 결과로 남는다. 여기서부터 욕망 설계는 자기관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리더십의 문제가 된다.

마지막으로 위험과 고통의 회피도 욕망 설계에 쓸 수 있다. 늦장 부린 아이에게 “오늘도 늦으면 아빠가 정시에 못 데리러 온다”고 말하면, 그 고통과 공포를 알기에 아이는 움직인다. 그러나 이것은 양날의 칼이다. 아픔도 배워야 하지만, 강도가 적정선을 넘으면 설계가 아니라 학대가 된다. 위험과 고통은 동기를 만들 수 있지만, 반드시 안전장치와 끝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욕망 설계의 시야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하나는 그 사람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즉 소확행이고, 다른 하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불행, 즉 소확불이다. 다른 사람을 알아 간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소확행과 소확불을 알아 가는 것이다. 개인의 욕망을 이렇게 위계적으로 볼 수 있다면, 같은 원리는 자식과 부하와 조직에도 적용된다.

5. 리더십은 집단 차원의 육아다

개인의 욕망을 위계적으로 볼 수 있다면, 같은 원리로 집단의 욕망도 설계할 수 있다. 다만 집단은 더 어렵다. 사람마다 소확행과 소확불이 다르고, 같은 보상도 사람마다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십은 단순히 일을 나눠 주는 기술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본능을 한 방향으로 정렬하는 기술이다. 다수를 상대로 본능을 설계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집단 차원의 육아다.

리더십은 구성원의 욕망 위계를 읽고 미션·보상·안전장치를 설계하는 일이라는 도해

여기서 육아라는 말은 상대를 어린아이 취급하라는 뜻이 아니다. 핵심은 소유하지 않으면서 성장 환경을 만든다는 데 있다. 자식은 나를 통해 나왔을 뿐 나의 소유물이 아니듯, 부하도 내 것이 아니다. 내 뜻대로 움직이는 도구로 대하면 안 된다. 차이라면 개인이 아니라 다수를 상대한다는 것, 그리고 아이보다 더 굳어 수정하기 어려운 인격을 상대한다는 것뿐이다. 자식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키우는 게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자랄 환경을 만드는 것처럼, 부하에게도 명령보다 환경이 먼저다.

그래서 리더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마다 다른 욕망의 위계를 읽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에 움직이고, 어떤 사람은 인정에 움직이고, 어떤 사람은 권한과 자유에 움직이고, 어떤 사람은 안정감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같은 커피 한 잔도 누구에게는 사소한 친절이고, 누구에게는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이 더 큰 보상일 수 있다. 리더가 구성원을 알아 간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소확행과 소확불을 알아 가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보상은 엉뚱한 곳에 꽂히고, 미션은 동기가 아니라 벌칙처럼 느껴진다.

그다음 해야 할 일은 미션을 만드는 것이다. 미션이란 목표와 보상이 분명하고, 과정에 일과 놀이가 결합된 직관적 본능 설계다. 간단한 집안일이라도 미션으로 만들 수 있다. “이 장난감을 사 주면, 앞으로 다른 친구들처럼 매일 가방을 혼자 드는 걸로 약속하자”처럼 욕망을 책임에 연결하는 것이다. 조직에서도 원리는 같다. 그냥 “열심히 해”라고 말하는 대신, 무엇을 만들면 어떤 권한이 생기고, 어떤 성과를 내면 어떤 보상이 따르는지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이때 정석을 강요하는 것보다 하고 싶게 만드는 쪽이 중요하다. 아이가 집안일을 놀이처럼 시작하게 하듯, 구성원도 일이 자기 성장과 인정과 성취로 이어진다고 느껴야 움직인다. 퍼포먼스는 처음에는 다소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정답만 고집하면 흥미가 죽고, 흥미가 죽으면 장기적인 설계가 무너진다. 장난감 욕심이 나쁜 것이 아니듯, 인정 욕구나 권한 욕구도 나쁜 것이 아니다. 그 욕심이 있어야 다른 본능 설계가 가능해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

다만 어떤 미션도 안전장치 없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 안전장치 없는 놀이기구, 끝나지 않는 놀이기구는 놀이기구가 아니다. 어떤 공포도 고생도 위험도 안전장치와 끝이 있기에 비로소 즐길 수 있다. 그 누구에게도, 안전장치 없고 끝을 알 수 없는 공포와 고생을 “난이도만 조정하면 즐길 수 있다”고 조언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유아용 놀이기구라도 끝이 없다면 지옥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육아에도 리더십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안전선이다. (사람은 힘들 때 포기하는 게 아니라 희망이 없을 때 포기한다.)

리더가 실제로 쥘 수 있는 보상은 두 종류다. 하나는 정신적 보상이다. 재미, 인정, 성장, 성취감이 여기에 속한다.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애초에 그 일이 맞지 않을 수 있고, 인정은 노력에 대한 짧은 칭찬으로 작동하며, 성장은 산출물에 대한 권한 확대로 작동하고, 성취감은 전적표와 등급처럼 결과를 공개적으로 기록할 때 강해진다. 다른 하나는 비정신적 보상이다. 음식이나 용품을 사 주는 물질적 보상, 점심시간 확장이나 조용한 조퇴 같은 휴식 보상,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과 자유를 보장하는 업무 보상이 있다.

이것을 단순화하면 이렇게 정리된다. 노력에는 인정과 작은 보상, 산출물에는 권한 확대와 실질 보상, 성과에는 인사평가와 더 큰 자유를 연결한다. 평가 주기도 달라야 한다. 노력 보상은 짧게, 성장 보상은 보통으로, 성취 보상은 길게 둔다. 주간 회의는 단순 보고 자리가 아니라 보상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칭찬은 공개적으로 하되, 지적은 개별적으로 불러서 한다. 공개 칭찬은 집단의 기준을 만들지만, 공개 지적은 소확불을 만들어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한 문장은 이것이다. 단순히 착한 리더는 아이를 망치는 부모와 같다. 좋은 리더십은 다정함만도 아니고 엄격함만도 아니다. 사람마다 다른 욕망의 위계를 읽고, 미션과 보상과 안전장치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일이다.

6. 공포마저 설계할 수 있다 - 고생은 의미와 안전장치를 붙인 공포다

안전장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마지막 재료인 고생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는 의미를 붙이고 지우는 기술이 감정과 욕망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았다. 부정적인 감정은 원래 기능으로 되돌릴 수 있었고, 욕망은 목표와 보상에 연결하면 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의미 설계는 욕망처럼 우리를 끌어당기는 감정뿐 아니라, 공포처럼 우리를 밀어내는 감정에도 적용된다.

욕망은 무언가를 향해 다가가게 만드는 적극적인 힘이고, 공포는 무언가에서 물러서게 만드는 방어적인 힘이다. 방향은 반대지만 둘 다 행동을 움직인다. 그래서 욕망을 설계할 수 있다면 공포도 설계할 수 있다. 쓸모없는 공포에는 의미를 지워야 하고, 통과해야 할 공포에는 의미를 붙여야 한다. 공포에 아무 의미도 붙이지 못하면 회피와 마비가 되고, 공포에 적절한 의미와 안전장치와 보상을 붙이면 도전과 스릴이 된다. 놀이기구가 바로 그 증거다. 같은 높이, 같은 속도, 같은 중력 변화도 안전장치와 끝이 있으면 재미가 되고, 안전장치와 끝이 없으면 지옥이 된다.

이 지점에서 가장 반직관적인 명제가 나온다. 고생도, 의무도 행복이 될 수 있다. 사람은 권리를 행사할 때만 행복한 게 아니다. 의무를 다할 때도 행복하다. 사랑이야말로 대표적인 의무다. 연인 간의 사랑, 모성애, 애국심, 애사심은 모두 어느 정도의 의무를 품고 있다. 사랑에 법적 권리와 의무를 부여한 것을 우리는 결혼이라 부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권리만이 행복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게 되었다. 일방적 의무에 지친 피로감인지, 미디어 탓인지, 저성장과 고실업의 산물인지는 몰라도, 의무가 주는 행복을 잊은 사회는 그만큼 행복의 절반을 잃은 셈이다.

물론 고생을 즐길 수 있다는 말은 정신승리가 아니다. 핵심은 고생에 무작정 좋은 의미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다룰 수 있는 형태로 재설계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놀이기구 공포의 기준이 다르듯 고생의 기준도 다르다. 처음에는 유아용 놀이기구처럼 시시할 만큼 약한 것부터 타야 한다. 그러다 자신이 무엇에 반응하는지, 즉 빠르기인지 높이인지 어지러움인지 소리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 그 변수를 아주 조금씩 올리며 반복하면 몸이 익숙해지고, 익숙해진 공포는 더 이상 마비가 아니라 스릴이 된다. 고생도 똑같다. 내가 비교적 잘 견디는 종류의 어려움부터 연습하고 도전하면, 즐길 수 있는 고생의 범위가 점차 넓어진다.

사람 사이의 갈등조차 그렇다. 갈등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피하고 싶은 공포지만, 그것을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성장의 재료가 된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을 즐기고, 해결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며 성장과 성취를 느낄 수 있다면 공포는 더 이상 회피 대상이 아니다. 어쩌면 큰 조직의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이런 극심한 갈등을 즐기고 풀어내는 능력일지 모른다. 리더가 다루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욕망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포가 설계 가능한 이유는, 공포 역시 어느 정도 학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고기조차 반복하면 공포를 학습하고, 그 공포로 다른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 학습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반대로 즐길 수 있는 쪽으로도 설계할 수 있다. 그러려면 먼저 공포의 종류와 강도를 알아야 한다. 공포에는 어둠, 소리, 무서운 광경, 높이, 어지러움(전정기관의 흔들림과 시각의 불일치), 속도, 중력 같은 종류가 있다. 이 변수들을 한꺼번에 올리면 트라우마가 되지만, 자기에게 맞는 변수를 찾아 조금씩 올리면 스릴이라는 상품이 된다. 공포와 흥분은 메커니즘이 같다 - 용기가 있다면 공포를 흥분으로 바꿀 수 있다. 단, 그 흥분을 화로 터뜨려서는 안 된다. 공포를 설계한다는 말은 공포를 다른 사람에게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공포의 강도와 방향을 다룰 수 있게 만든다는 뜻이다.

고생은 공포 변수를 낮은 단계부터 연습할수록 즐길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는 도해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 모든 공포가 설계 대상은 아니다. 고생과 고통은 다르고, 고생과 학대도 다르다. 고생은 하기 싫거나 잘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이되,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 강도가 높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심부름은 하기 싫어도 강도가 낮으니 고생이라기 어렵고, 어떤 문제 해결은 누군가에겐 삽질이지만 방법을 아는 사람에겐 고생이 아니다. 반려견 훈련사 강형욱이 가족의 개 번식업 환경에서 자라 그 반대편의 일을 더 잘하게 된 것처럼, 극한의 고통을 아는 사람이 그 반대의 일을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아무에게나 권해서는 안 된다. 고통은 때로 능력의 재료가 되지만, 안전장치 없이 주어지면 사람을 망가뜨린다.

그래서 고생에는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의미가 있어야 하고, 보상이 있어야 하고, 안전장치가 있어야 하고, 끝이 있어야 한다. 1년에 하루를 굶기는 건 도전일 수 있지만, 일주일을 굶기는 건 학대다. 고생의 결과에는 작게나마 권한이나 혜택이 따라야 한다. 이 조건이 있을 때만 고생은 성장의 재료가 되고, 조건이 없으면 그저 고통이 된다.

고생을 설계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하고 싶은 일에 반대급부로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으면 배변을 치우고 매일 산책시키는 건 네 몫이다.” 다른 하나는 미션과 목적을 주고 그에 대한 혜택을 거는 것이다 - “이걸 달성하면 저걸 주겠다.” 결국 고생 설계란 공포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공포에 의미와 출구와 보상을 붙여 감당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일이다.

공포는 의미·보상·안전장치·끝을 붙이면 설계 가능한 고생으로 바뀐다는 도해

그렇다면 욕망을 참는 것 자체가 고생인가. 여기서 한 가지 경계해야 할 함정이 드러난다. 모든 인내가 미덕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내하라, 그러나 무작정 인내하지는 마라. 모든 일에 인내력은 필수다. 그러나 인내는 설계된 고생을 끝까지 통과하는 능력이지, 즐기지도 못하고 혼자 감당할 수도 없는 고통을 억지로 떠안는 능력이 아니다. 그런 고통은 다른 이에게 전이되어 모두를 힘들게 한다. 인내의 달콤한 열매는 얻지 못한 채 고통이 또 다른 고통만 낳는다. 지금은 전쟁 시기가 아니다 - 전쟁이란 전이된 우리의 고통을 말로 풀 수 없어 힘으로 풀려는 것이고, 평화 시에는 고통을 피하거나 말로 풀 수 있다. 그러니 인내는 하되, 필요 이상의 고통까지 떠안으려 하지 마라.

그리고 힘들면 울어도 된다. 어차피 인생의 기본값은 울음이다. 태어날 때 울음으로 시작해 그 울음을 하나씩 줄여 가는 것이 삶이고, 어려서 울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이다. 다만 울고 싶지 않다면 체력을 키워야 한다. 결국 체력이 가장 밑에 있기 때문이다. 피로는 내성으로 버틸 수 있지만 내성으로만 버티는 상태가 지속되면 병이 되고, 인내력을 키우면 피로내성도 강해지지만 인내로 버티는 것 역시 지속되면 고질병이 된다. 체력을 키워야 인내력과 피로내성이 함께 강해진다. 지력을 받치려면 정신력이 필요하고, 정신력을 받치려면 체력이 필요하다. 울음을 줄이는 바닥 공사가 체력인 것이다.

결국 설계란 실패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다. 실패해도 덜 망가지고, 덜 후회하도록 의미와 욕망과 고생의 범위와 비용을 조정하는 기술이다. 그러면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그렇게 설계했는데도 실패했을 때, 후회는 어떻게 줄일 것인가.

7. 맺음 - 후회를 줄이고 행복을 만드는 사람

사람이 어떤 목적을 위해 노력했는데 실패했을 때, 후회는 두 차원에서 온다. 하나는 그 목적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했을 때, 다른 하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을 때다. 그러니 답은 정해져 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되, 무의미한 희생은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

여기서 흔한 착각을 깨야 한다. 노력과 희생은 절대선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단어지만, 결코 절대선이 아니다. 하루를 굶은 사람에게 주는 밥 한 그릇과 한 시간을 굶은 사람에게 주는 밥 한 그릇이 다르듯, 노력과 희생의 가치는 철저히 상대적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희생도 아닌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거대한 희생일 수 있다. 그래서 남의 성공담을 내게 들여올 때는, 내가 치러야 할 희생과 그가 치른 희생이 다르다는 것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노력과 희생의 교환 관계를 늘 명확히 하라. 최소한의 희생과 최대한의 노력으로 임할 때, 설령 목적 달성에 실패하더라도 후회는 적어진다.

후회를 줄이는 장치로, 자기 자신에게 규칙을 걸 수도 있다. 특정 부분에 도전하기 위해 일부러 하지 않으면 고생이라는 벌을 받겠다고 자기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막연한 염원이나 기도와는 다르다. 설계된 규칙이다. 이렇게 보면 후회 관리 역시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의미를 다시 붙이고, 욕망을 보상에 연결하고, 고생의 범위를 조정해 실패의 비용을 낮추는 일이다.

후회 중에서도 가장 오래 남는 것이 배신과 절망의 기억이다. 과거의 그 한 번에 사로잡혀 자신을 더 불행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그 배신과 절망에도 다른 차원의 선의(착시와 같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을 수 있음을 생각하고, 그 점을 딛고 더 건설적인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배신과 절망조차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의 슬픔과 분노를 아는 사람이 더 성숙해진다. 그런 감정을 깊이 알수록 오히려 유리하다. 필요한 것은 거기에 성공의 DNA를 이식하는 일이다.

게다가 행복과 불행은 양자택일이 아니다. 매 순간을 기준으로 보면 행복과 불행은 동시에 존재하지 않지만, 하루나 한 달을 기준으로 보면 둘은 공존한다. 행복하다고 불행하지 않은 게 아니고, 불행하다고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다. 우리는 행복하면서 동시에 불행할 수 있다. 그러니 슬픈 일이 있다고 계속 슬퍼하고만 있을 이유가 없다.

이제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닿는다. 당신은 행복을 만드는 사람인가, 사는 사람인가. 행복을 사는 사람은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둔 의미와 보상과 안전장치를 소비한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통스러운 일에 붙은 의미를 다시 고르고, 필요 없는 의미를 지우고, 견딜 만한 고생에는 새로운 의미와 보상을 붙인다. 즉 행복을 만든다는 것은 고통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 가능한 형태로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그러니 건물주를 부러워하지 마라. 단지 부모를 잘 만나 행복을 사기만 하는 소비적인 사람일 뿐이다. 진정 가치 있는 사람은 인류를 위해 행복을 생산하고 한 걸음 진일보시키는 사람이다. 행복을 만들 때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최소화해야 하는 것처럼, 행복을 소비할 때도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것을 우리는 갑질이라 부른다. 대부분의 행복은 돈으로 측정되지만, 돈이 아닌 행복과 고통도 각각 최대화하고 최소화해야 한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면, 방법은 화려하지 않다. 매일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꾸준함이란 같은 고생에 매일 조금씩 다른 의미를 붙여 보는 일이다. 꾸준히 하다 보면 아쉬운 날도 온다. 그런데 아쉬움이 남는다는 건 아직 그 일이 지루하지 않다는 뜻이니 오히려 좋은 신호다. 그 꾸준한 하루하루가 곧 여행이기도 하다. 멋진 장소에 가는 것만이 여행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지식의 끝에 도달하는 것도 여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잊게 하고 사랑은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니, 무엇을 기억할지를 고르는 일이 곧 어떤 사람이 될지를 고르는 일이다.

무엇을 기억할지를 고르는 일은 결국 무엇을 믿을지를 고르는 일로 이어진다. 믿음이란 오래 붙잡기로 선택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반드시 어떤 믿음에 기대어 살아간다. 때로는 죽음이 구원이라는 믿음조차 사람을 움직일 만큼, 믿음은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의미다. 그러니 무엇을 믿을지를 설계하는 것이 자기관리의 가장 깊은 층위다. 힘들 때 필요한 것은 막연한 긍정이 아니라, 지금의 고생이 어디로 이어질지를 보여 주는 구체적인 미래상이다. 넓고 맑은 물이 보이는 집으로 이사 가는 꿈, 와이프의 공방을 차려 주는 꿈, 물이 보이는 경치 좋은 집에서 원격으로 일하는 꿈, 큰 정보 회사를 일구는 꿈, 크게 성공해 모교에 건물이나 공원 하나를 세워 주는 꿈. 그런 상상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지금의 고생에 방향을 붙이는 의미의 초안이다.

인생은 죽기 위한 과정이지만, 그 과정에 무엇을 부여하느냐는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은 고통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의미는 붙일 때 힘이 되고 지울 때 평온이 된다. 욕망은 목표와 보상에 연결할 때 동력이 된다. 공포와 고생은 의미와 안전장치와 끝을 붙일 때 스릴과 성장으로 바뀐다. 기쁨과 욕망과 공포와 고통까지, 의미를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에 어떤 의미를 붙이고, 어떤 의미를 지우고, 어떤 고생과 성장으로 바꾸어 갈지를 계속 설계하는 사람. 그것이 행복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행복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행복을 만드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회수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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