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백 번을 죽어도 끝나지 않는데, 인생은 왜 한 번의 실패로 끝나는가
게이머는 보스에게 백 번을 죽어도 웃으며 백한 번째 도전을 누른다. 게임에서 죽음은 이벤트일 뿐, 끝은 플레이어가 포기하는 순간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현실에서는 실패 한 번에 주저앉는다. 무엇이 다른가. 실패의 크기가 다른 게 아니다. 실패를 받아 든 뒤의 처리가 다른 것이다. 같은 비관이 누군가에게는 걱정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계획이 되며, 같은 위험이 누군가에게는 미신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도전이 된다. 자기를 돌아보는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제자리에서 맴돌면 후회가 되고, 앞으로 흐르면 성찰이 된다. 후회와 성찰은 같은 에너지다.
1. 게임의 끝은 죽었을 때가 아니라 포기했을 때다
게이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보스에게 백 번을 죽어도 백한 번째 도전을 누른다. 게임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의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진짜 끝은 단 하나뿐이다. 플레이어가 패드를 내려놓는 순간이다.
인생도 구조가 같다. 실패는 이벤트고, 끝은 포기다.
여기서 논리를 정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포기하지 않으면 성공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포기하지 않아도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 포기하지 않음과 성공 사이에는 상관관계만 있다. 그러나 반대 방향은 다르다. 포기와 실패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다. 포기하는 순간 실패는 확정된다.
성공을 보장하는 버튼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실패를 확정하는 버튼은 정확히 하나 있다. 포기다.
이 비대칭을 뒤집으면 묘한 위로가 나온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인생에서 실패는 좀처럼 “확정”되지 않는다. 그 전까지 모든 실수와 부분 실패는 결말이 아니라 피드백 루프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그래서 게임 오버 화면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다시 할 기회가 남아 있는 한,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다음 트라이다. 감정적으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다시 처음부터 시도하는 것. 그것이 노력의 첫 번째 정의다 -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
2. 인생에도 세이브가 있다 - 실패의 기록이다
“게임이야 죽어도 세이브를 불러오면 되지만, 인생에는 세이브가 없잖아.” 당연한 반론이다. 그런데 세이브의 본질을 따져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임의 세이브 데이터는 플레이어가 그 게임을 포기하는 순간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디스크에 데이터가 남아 있어도, 다시 켜지 않으면 그것은 세이브가 아니라 유품이다. 즉 세이브의 본질은 저장된 데이터가 아니라 “이전 시도의 정보를 가지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다. 데이터는 부품이고, 의지가 엔진이다.
그렇다면 인생에도 세이브가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실패에 대한 관찰과 기록이 있는 한 우리는 “배운 채로” 다시 시작한다. 게임 장르 중에 로그라이크가 정확히 이 구조를 판다. 죽으면 아이템도 진행도 전부 날아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데, 그런데도 플레이어는 점점 멀리 간다. 캐릭터는 리셋되지만 플레이어의 지식은 리셋되지 않기 때문이다. 캐릭터는 죽고, 플레이어는 강해진다. 인생이라는 세이브 없는 게임에서 우리가 가진 세이브가 바로 이것이다 - 시행착오의 관찰과 기록.
이 관점은 배움의 정의도 뒤집는다. 실패하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 동시에 실패하더라도 포기해 버리면 배울 수 없다. 배움은 실패와 재시도 사이, 그 좁은 틈에서만 일어난다. 높은 학력이 증명하는 것도 사실 두 가지다. 실패하지 않기 위한 연습을 얼마나 잘해 왔는가, 그리고 실패했을 때 거기서 얼마나 잘 배우는가. 학력이 높을수록 실패에서 배우는 능력이 좋은 경향이 있는 이유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책의 정의가 새로 쓰인다. 책은 인류의 세이브 포인트다. 내 인생은 1회차 단판이지만, 책을 펴는 순간 다른 사람이 평생을 들여 만든 세이브 파일을 로드할 수 있다. 내가 죽어 보지 않은 곳에서 죽어 본 사람의 기록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선생님이라는 직업도 같은 자리에 있다. 게임으로 치면 선생님은 NPC의 표본이다 - 항상 그 자리에 남아 젊은 모험가들을 떠나보내기만 할 뿐, 같이 모험을 떠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을의 NPC가 없으면 모험가는 지도도 물약도 없이 떠나야 한다.
3.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은 무한히 노력한 사람이다
에디슨은 전구를 만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통하지 않는 방법 1만 가지를 발견했을 뿐이다. 그에게 1만 번의 실패는 1만 개의 결말이 아니라 1만 줄의 데이터였다.
이 문장을 운의 관점에서 다시 읽으면 이렇게 된다. 시도 한 번은 복권 한 장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한히 노력할 수 있다면,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은 무한히 노력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운이 좋아진 사람에게는 위기란 없다. 단지 좋거나 좋지 않은 기회가 있을 뿐이다. 준비된 자에게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은 정신승리가 아니라 산수다 - 시도의 모수가 많은 사람에게는 어떤 국면도 다음 시도의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망 앞에서 필요한 문장은 하나다. “이 정도의 절망으로 나를 포기하게 할 순 없다.” 절망에 빠트리려는 자는 절망에 익숙한 자를 이기지 못한다. 인간은 누구나 인성을 수련하기 위해 인생을 산다 - 도를 닦는다는 게 별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다. 절망에 익숙해지고, 이를 극복하고, 건강함에 감사하고, 전쟁이 나지 않았음에 감사하는 것.
자신을 한심하다고 푸념할 때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가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할 때도 아니다. 바로 내가 전력으로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다. 자신감과 노력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재능조차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그래도 재능이 있어야지”라는 반론이 나올 차례다. 그런데 재능은 생각만큼 선천적이지 않다. 뇌는 사용할수록 커지고, 욕구하는 만큼 커진다. 인간은 거울 뉴런으로 남이 하는 것을 복제하면서 재능을 만들어 간다 - 동물 사이에서 자란 아이가 인간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다. 인간의 직업 대부분에는 1만 시간의 법칙이 적용된다. 단, 조건이 하나 붙는다. 코치가 필요하다.
흔히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하고, 즐기는 자는 천재를 이기지 못한다”는 식으로 천재·노력·즐김을 독립된 등급처럼 말하지만, 셋은 독립적이지 않다. 천재성은 노력으로 만들어지고, 그 노력을 지속시키는 것은 재미다. 노력과 재미는 곱셈 관계라 한쪽이 0이면 전체가 0이 된다. 그리고 그 재미를 억누르는 것이 불안과 공포다. 불안과 공포를 집중력으로 이겨내고 노력할 때 비로소 천재성이 발휘된다.
재능에는 한계가 있을지 몰라도 경험에는 한계가 없다. 그 경험에서 얼마나 배울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사람은 할 수 있는 것밖에 못한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이 말이 고착되면 “할 수 있는 것밖에 안 한다”가 되어 도전이 멈춘다. 할 수 있는 것만 할수록 할 수 있는 것 외에는 못 하게 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려 할수록 못 하는 것이 줄어든다. “안 한다”와 “못 한다”는 노력과 결합해 서로 자리를 바꾼다.
노력에는 보험도 하나 붙어 있다. 노력은 꿈을 배신해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노력한다고 꿈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꿈이 무산된다고 노력한 자기 자신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세상 누군가의 영웅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출 이유가 없다. 한 명부터 시작이다.
운명론은 진통제다
반대편에는 운명론이 있다.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돼.” 그런데 운명이란 인간의 공포와 게으름이 만든 진통제다. 진통제는 통증을 없애 주지만 병을 고치지는 않는다. 치유의 시작이 두들기는 폭력일 수는 있다 - 멈춘 기계를 때리고, 뭉친 근육을 두드리듯. 그러나 근원적 해결은 두들김만으로 되지 않고 수술, 약물, 휴식, 부품 교체 같은 전혀 다른 작업을 요구한다. 운명론은 평생 진통제만 먹으며 수술을 미루는 일이다.
여기서 근면함과 노력도 갈라진다. 근면함은 남들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해내는 능력이고, 노력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남들의 의견과 무관하게 지속하는 능력이다. 겉보기엔 똑같은 성실이지만 동력의 출처가 다르다. 남이 시킨 일은 시킨 사람이 사라지면 멈추지만, 내가 원하는 일은 멈출 이유가 없다. (근면함이 애초에 산업시대 공교육이 찍어내도록 설계된 인간상이라는 이야기는 별도 글에서 다뤘다.)
단, 올바른 노력이어야 한다
노력과 성과의 조합은 네 가지 감정을 만든다.
| 열심히 하지 않음 | 열심히 함 | |
|---|---|---|
| 성과 있음 | 횡재 | 보람 |
| 성과 없음 | 후회(납득) | 아쉬움(불만) |
흥미로운 것은 괄호다. 열심히 하지 않아 성과가 없으면 후회스럽지만 납득은 된다 - 원인을 자신이 아니까. 그런데 열심히 했는데 성과가 없으면 아쉬움을 넘어 불만이 쌓인다 - 어디가 잘못됐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불만의 칸에서 빠져나오는 길이 바로 “올바른 노력”이다. 노력에 죄는 없다. 다만 올바른 노력이 아니라면 그 노력은 결코 좋은 결과로 보답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노력이 올바른지를 고르는 데에는 먼저 그 길을 가 본 선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좋은 성과를 수반하는 노력은 혼자 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 앞서 말한 코치, 그리고 인류의 세이브 포인트인 책이 필요한 이유다.
4. 노력의 두 번째 정의 -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노력의 두 번째 정의는 뜻밖에도 태도에 관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하면 결국 행복하지 못하다. 반드시 놀아야만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일이든 공부든 육아든 운동이든, 최대한 지금을 즐기는 긍정적인 마인드와 시각이 필요하다.
이게 한가한 소리가 아닌 이유는, 믿음이 실제로 몸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몸을 바꾼다
인간은 약 5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세포 하나하나는 독립적이지만, 공동체 안의 세포는 중앙의 목소리를 따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중앙의 목소리가 마인드다. 뇌는 신호를 인지한 뒤 마인드를 만들고, 그 정보를 세포로 보낸다. 때로는 본능이 세포에게 행동을 요구하는데 이성이 그 행동을 막는다 -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가 작동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래서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도 몸이 바뀔 수 있다. 가짜 약을 진짜라 믿으면 증상이 호전되고, 해롭다고 믿으면 실제로 부작용이 나타나는 플라시보와 노시보 효과는 중앙의 목소리가 공동체를 실제로 통제한다는 증거다.
믿음은 밖으로도 새어 나간다. 말로 전하지 않아도 나의 생각과 판단은 표정과 태도와 분위기가 되어 상대에게 전달된다. 생각은 방송이다. 방송을 한다고 모두가 듣는 것은 아니지만, 들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들린다.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의 시선을 느낌으로 알아채듯, 인간에게도 그 감각이 남아 있다 - 대화라는 강력한 도구 덕에 퇴화하고 있을 뿐이다. 단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같은 생각이 집단으로 모이면 그 힘은 개인보다 훨씬 강해진다.
욕설이 사람을 바꾸는 이유
누군가 나에게 “개새끼”라고 외쳤다고 하자. 물리적으로 일어난 일은 공기의 진동뿐이다. 내 부모가 개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관계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변한다. 생각이 바뀌고 감정이 바뀌고 행동이 바뀐다. 2000년 전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같은 진단을 남겼다. “인간을 동요시키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판단이다.”
이 사실은 인간에 대해 중요한 것을 알려준다. 만약 믿음 따위 없다고 주장하려면 이런 언어적 자극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욕설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말에도 우리는 똑같이 반응한다. 사람은 이성보다 감성이 본질에 훨씬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정이 있는 한, 종교가 없어도 믿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무교라는 사람의 마음속에도 믿음은 자본주의, 합리주의, 개인주의, 사실주의 같은 종교화되지 않은 개념의 형태로 존재한다. 거꾸로 종교를 가졌다고 모두에게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다 - 종교에 편승했을 뿐 진짜 믿음은 다른 곳에 있는 사람도 많다. 믿음이 종교가 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집단으로 확대되면서 계급화될 때 - 다른 이의 믿음을 자신의 영달의 수단으로 쓰는 착취가 시작될 때다.
믿음이 이렇게 강력하다면, 그 힘을 의도적으로 쓸 수도 있다. 시각적으로 분명하고 느낌이 살아 있는 함축적인 문장 - “나는 행복하다”, “나는 사랑한다” - 을 행복한 장면의 상상과 함께 반복하는 긍정 암시가 그것이다. 염주를 돌리며 108번을 반복하든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외우든, 핵심은 말과 함께 그 느낌을 실제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반복된 암시는 기본 정서를 바꾸고, 사람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끌리는 정서가 있어서, 다양한 정서를 갖춘 사람은 그만큼 다양한 사람을 끌어당기게 된다.
생각이 안 바뀌면 행동을 바꿔라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은 같은 결과를 두고 갈리는 관점의 차이, 심리 상태의 차이다. 부정적인 단어 앞에 “긍정적”을 붙이는 사소한 언어 습관만으로도 생각의 방향이 바뀐다. 그리고 더 강력한 지렛대가 있다. 생각은 행동을 결정하지만, 행동은 환경을 바꾸고 환경은 다시 생각을 바꾼다. 산더미 같은 업무 중의 짧은 산책 하나가 막힌 아이디어를 푸는 것처럼, 아주 단순한 행동의 변화가 생각을 바꾸는 가장 빠른 입구가 된다.
걱정의 올바른 탈출구는 기도가 아니라 계획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하면 흔히 “걱정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런데 걱정을 해소하겠다고 걱정을 반복하거나 기도에 기대는 것은 출구가 아니다. 걱정의 올바른 탈출구는 계획이다.
계획은 미래를 낙관해서 세우는 게 아니다. 일이 틀어질 것을 비관하기 때문에 세우는 것이다. 즉 걱정과 계획은 같은 비관에서 출발한다. 갈림길은 대안이다.
| 대안을 세울 수 없음 | 대안을 세울 수 있음 | |
|---|---|---|
| 생각대로 진행됨 | 걱정 | 계획 |
| 생각대로 진행 안 됨 | 좌절 | 짜증(갈등) |
대안이 없는 사람은 일이 잘 풀리는 중에도 걱정하고, 일이 틀어지면 좌절한다. 대안이 있는 사람은 일이 풀리는 동안 계획하고, 틀어지면 짜증이 나지만 - 짜증은 좌절보다 한참 낫다. 대안이 있으니 다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획하지 못하고 걱정만 하는 이유는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안을 만드는 절차를 배운 적이 없어서다. 문제를 정확히 정의하고, 로직트리로 쪼개 분석하고, 회의로 다양한 생각을 모으는 것 - 대안(代案)은 말 그대로 “대신하는 안”이고, 대신하는 안은 언제나 있다.
걱정이 무서운 이유는 따로 있다. 걱정은 행복 속에서도 행복을 잊게 만드는 힘이 있다. 10년 이사 걱정 없는 집을 구해 놓고 “언제 샀어야 했나”를 곱씹고, 아기를 안고서 “젖을 안 먹으면 어쩌나”만 헤아린다. 좋은 것은 걱정 없이 그 자체로 좋아하라. 집은 10년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그것을 극대화할 방법을 계획하면 되고, 아기는 그 웃음 자체로 만족하면 된다.
한 가지 더.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과 부정적인 마음을 제거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라 별개의 두 축이다. 부정을 품은 채 긍정을 덧칠할 수도 있고, 부정만 비워 놓고 긍정을 채우지 않을 수도 있다. 마음속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긍정적인 생각으로 채우는 것까지가 한 세트다. 그리고 그 마음 상태와 “대안을 모색하는 행동” 역시 별개의 축이다. 부정을 비우고 긍정을 채운 마음으로, 대안을 계속 찾아가는 것 - 이것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의 완성형이다.
5. 후회와 성찰은 같은 에너지다
긍정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재료들도 다시 보면 같은 구조다.
공포와 고생이 있기에 행복이 더 행복답다. 놀이기구의 공포는 적절히 설계되는 순간 스릴이라는 상품이 된다. 그리고 놀이기구를 타다 보면 탈 수 있는 기구의 범주가 늘어나듯, 고생도 하다 보면 할 수 있는 것이 늘고 그만큼 경험이 는다. 하루 굶어 본 사람에게 같은 밥은 차원이 다른 맛이 된다. 고생도 효과적으로 설계하면 놀이기구의 공포처럼 즐길 수 있고, 죽음도 반복되면 익숙해지듯 시련은 극복할 때마다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든다.
알면 알수록 긍정적일 수밖에 없다. 공포가 가장 큰 순간은 아무것도 안 보일 때가 아니라 어중간하게 보일 때다. 완전한 어둠에서는 공포가 차라리 무뎌지고, 완전한 빛 아래에서는 공포스러운 것도 덜 공포스럽다. 진정 공포스러운 대상조차 알면 알수록, 보면 볼수록 덜 공포스러워진다. 게임의 이해도가 높을수록 어려운 난이도와 과업이 쉽게 풀리는 것과 같다. 그러니 시야를 넓히는 것이 곧 긍정의 기술이다. 역사를 보면 남들보다 길게 생각할 수 있고, 우주를 보면 남들보다 넓게 생각할 수 있다. 최악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보다 나은 현실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전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 긍정적이어서 성공하는가, 성공해서 긍정적인가. 답은 정직하게 후자다. 성공해서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이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 작은 긍정이 작은 성공을 만들고, 반복된 성공이 더 큰 긍정을 만든다. 긍정은 타고나는 기질이 아니라 복리로 불어나는 자산이다.
그리고 이 글의 제목이 묻는 질문에 답할 차례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에너지가 있다. 이 에너지가 건설적인 방향으로 흐르면 우리는 그것을 성찰이라 부르고, 제자리에서 맴돌면 후회라고 부른다. 다른 감정이 아니다. 같은 에너지의 다른 처리다. 포기하려는 마음조차 자기성찰의 부정적 발현이다.
같은 구조의 짝은 도처에 있다.
| 같은 재료 | 갉아먹는 처리 | 키우는 처리 |
|---|---|---|
| 실패 | 포기 | 기록(세이브) |
| 자기를 돌아봄 | 후회 | 성찰 |
| 불확실한 미래 | 걱정 | 계획 |
| 위험 | 미신 | 도전 |
| 고생 | 고통 | 경험 |
| 자기 인식(주제 파악) | 포기 | 겸손 |
| 반항 | 배신 | 용기 |
그래서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좋은 신호다. 과거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면 안 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만큼 성장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고생과 역경을 이겨내며 성장한다. 다만 여기 함정이 하나 있다. 역경과 부주의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지저분한 집에서 사는 것은 역경일 수도 있지만 그저 부주의일 수도 있다. 역경은 견디고 극복할 대상이지만, 부주의는 그냥 고치면 되는 것이다. 둘을 동일시하며 “나는 역경을 견디는 중”이라 말하는 것은 성찰이 아니라 자기기만이다.
혼자 처리 방향을 돌릴 수 없을 때를 위한 장치도 있다. 애니메이션 그렌라간의 유명한 대사 - “너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면, 너를 믿는 나를 믿어라.” 누군가를 믿고 계속 응원하는 것이 그 자체로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해결할 용기를 주고, 그 용기가 점차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연료가 된다.
마지막으로 세이브 관리법. 인생에는 세이브가 없지만, 기억을 잃어버리면 항상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신은 세이브 대신 시간이라는 망각의 약을 처방했다. 의미를 두지 않으면 기쁜 일도 없지만 상처받을 일도 없다. 세이브를 위해 자기성찰은 필요하다. 그러나 후회가 너무 강하다면 세이브를 덮어씌워야 한다. 사람은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것들은 완전히 잊을 수 없다. 그런 것은 지우는 게 아니라, 그 무게를 견디며 사는 것이다.
6. 노력의 세 번째 정의 - 이루기 위해 미루지 않는 것
먹고 자고 번식하는 것은 모든 생물이 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공부하는 생물이고, 도를 닦는 생물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세상이 준 능력을 찾아 지속적으로 개발하는 것 - 그러니 인간이기를 그만두지 않는 한 공부를 멈춰서는 안 된다.
방법은 화려하지 않다. 매일 해야 하는 일을 계속하면, 그것이 쌓여 결국 꿈을 이루게 한다. 매일 읽고, 매일 정리하고, 매일 만들고, 매일 기록해야 평생 지속할 수 있다. 동기부여 역시 누가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다. 아침 1시간을 유익하게 보내면 모멘텀 효과로 하루 전체가 유익해진다 - 출근길에 뛰는 것은 하루의 시작을 유익하게 만드는 아주 좋은 예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긍정의 마인드를 나누어라. 불평을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물론 바란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바라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시작을 막는 것은 대개 능력이 아니라 제한적 신념 - “나는 안 될 거야” 같은, 나를 좌절하게 만드는 믿음이다. 그것을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라. 제한적 신념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 의견이다. 의견이면 무시하면 된다.
미루지 않는다는 것이 쉬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성장, 번식, 휴식 세 가지 중 하나를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성장은 공부와 단련이고, 번식은 연애·임신·육아와 그것을 위한 행동이며, 휴식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이다. 가장 좋은 일은 셋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이고, 가장 나쁜 일은 셋 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노력이란 어느 하나만 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지, 휴식이나 연애를 죄처럼 여기는 게 아니다.
미루는 마음의 가장 교묘한 변장이 미신이다. 도전과 미신은 닮았다. 둘 다 자연에 존재하지 않고 우리 마음에만 존재하며, 둘 다 위험에 대한 대응이다. 그러나 처리가 정반대다. 미신은 위험의 해결을 부적과 운세와 운명, 곧 다른 존재에게 미루는 것이고, 도전은 같은 위험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같은 위험 앞에서 누군가는 점집으로 가고 누군가는 계획서를 꺼낸다.
마지막으로, 미루지 않는 사람의 시선은 미래를 향한다. 아이는 미래를 살고, 어른은 과거를 산다. “나는 겨울이 좋아. 이글루를 만들 수 있으니까.” 같은 겨울을 두고 과거를 사는 사람은 옛날에 이글루를 만들어 본 추억 때문에 좋아하고, 미래를 사는 사람은 아직 만들어 보지 못해서, 만들고 싶어서 좋아한다. 아이처럼 살아라.
7. 겸손 - 부족함을 알기에 마지막까지 노력하는 것
노력 이야기를 겸손으로 잇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실력의 실수는 성실히 하다 보면 패자부활전이 온다. 그러나 인격의 실패자에게는 패자부활전이 오지 않는다. 실력이 월드클래스인 사람 중에 인격이 월드클래스가 아닌 사람은 거의 없다. 실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실력이 사람(인격)을 능가할 수는 없다.
오만의 메커니즘은 이렇다. 자유와 자신감과 힘을 가졌으나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말이 많아진다. 그리고 말이 많아지는 만큼 더 성장할 수 없다. 말하는 동안은 입력이 끊기기 때문이다. 겸손한 자는 말을 되도록 아끼고, 오만한 자는 말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는 오만으로 귀결되기 쉽고, 오만은 죽음으로 귀결되기 쉽다. 자신감의 원인은 매우 모르거나 매우 잘 알기 때문인데 - 심리학은 앞의 것을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부른다 - 아무런 노력 없이 강한 힘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오만해지기 마련이다.
배려를 배우지 못한 열정도 같은 병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코미디언 조지 칼린의 운전 농담이 정확한 진단이다. “나보다 느리게 운전하는 사람은 전부 멍청이고, 나보다 빠르게 운전하는 사람은 전부 미친놈이다.” 자기 속도를 세계의 기준으로 삼는 순간, 세상 전체가 멍청이와 미친놈으로 가득 차 보인다.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기준이다.
겸손은 동시에 끝까지 가는 힘이기도 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방심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하는 것 - 야구의 오래된 격언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여기서 겸손의 역설이 드러난다. 포기의 가장 흔한 표현이 “내 주제를 안다”인데, 겸손의 정의 역시 자기 주제를 아는 것이다. 포기와 주제 파악은 사실상 같은 말이다. 같은 자기 인식이 정반대 행동의 근거가 된다.
- 주제를 아니까 포기한다 - 자기 인식을 한계의 “확인”으로 처리한 것
- 주제를 아니까 방심하지 않고 노력한다 - 자기 인식을 출발점의 “측정”으로 처리한 것
그래서 겸손은 예의범절이나 도덕적 장식이기 전에 인식의 정확성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정확히 알고, 정확히 알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 겸손은 노력의 반대말이 아니라 노력의 전제 조건이다. 빨리 자랄수록 크게 자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빨리 자란다고 계속 성장한다는 보장은 없다. 인간에게 빨리 자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죽을 때까지 계속 성장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질수록 더 겸손하고 조심해야 하는 이유이고, 자부심이 있다고 타인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도 되는 게 아닌 이유다.
흥미로운 것은 겸손이 마음가짐이 아니라 행동 설계로 연습된다는 점이다. “겸손해져야지”라고 다짐하는 대신, 겸손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기본값으로 깔아 둔다.
-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주변의 단점보다 장점을 보며 감사한다. 시선의 기본값을 바꾸는 훈련이다.
- 말은 성우처럼 한다. 복식호흡으로 정확히 발음하려 하면 말은 저절로 느려지고, 느려진 말로는 흥분할 수가 없다. 절대로 흥분하지 않는 중후한 목소리가 목표다.
- 아랫사람의 생각을 먼저 묻는다. 사람은 말할 기회를 얻을 때마다 열정이 자란다. 실패했을 때는 무엇이 실패인지 명확히 짚은 뒤 “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는지”를 묻고, 성공했을 때는 원하는 것을 물어보고 그것을 주는 것이 상이다. 다만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줄 수 없는 자신을 용서할 것.
- “아니다”라는 말은 글로 한다. 글로 쓰려면 상대의 생각을 충분히 검토해야 하고, 검토 끝에도 방법이 없을 때만 거절이 나가게 된다.
- 카메라 앞에서 못할 행동과 말은 카메라가 없어도 하지 않는다.
마지막 항목에 붙은 결론이 이 목록 전체의 요약이다. 조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라.
8. 용서는 겸손 더하기 노력이다
여기까지 오면 묘한 공식 하나가 성립한다. 용서 = 겸손 + 노력.
타인의 잘못이라는 재료를 받았을 때, 갉아먹는 처리는 원한이고 키우는 처리는 용서다. 그런데 용서가 성립하려면 두 개의 부품이 모두 필요하다.
- 겸손 - 인간은 누구나 실수한다는 정확한 인식. 나도 같은 자리에 서면 같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앎.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부족함을 이해할 수 있다.
- 노력 - 그 인식 위에서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가는 긍정적 처리. 상대를 끝내 이해하고 다음을 약속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라 노력이다.
그래서 용서는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강함의 여유다. 충분히 강한 자만이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니까”라고 말할 여유가 있다. 노력과 겸손을 최대화한 사람의 극단적인 상은, 자신을 오해로 해친 상대조차 이해하고 그에게 희망을 약속하는 사람이다.
배신에 대한 시각도 같은 자리에서 나온다. 배신이 있기에 진정한 충성이 가능하다. 게임 속 NPC는 절대 배신하지 않지만, 그래서 NPC의 충성에는 아무 가치가 없다. 인간은 NPC와 달리 스스로 행동하고 배신할 수 있기에 재미있는 것이고, 그런 존재가 남아 있을 때만 충성이 의미를 갖는다. 아이의 반항도 마찬가지다. 반항은 배신의 연습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도전을 여는 용기의 연습이다. 배신과 용기는 기재가 같다 - 그러니 반항이라는 재료를 받은 부모가 할 일은 재료를 탓하는 게 아니라 처리를 돕는 것이다.
이렇게 현명한 자세로,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하나씩 업적을 함께 이루다 보면, 어느새 내 편이 늘어나 있을 것이다.
9. 맺음 - 삶은 시련과 사람으로 쓴 글자다
세상에는 걱정과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콘텐츠가 넘쳐난다. 공포는 클릭을 부르고, 클릭은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세상을 재료로 받아 들고도 다른 처리는 가능하다. 지식과 통찰을 기반으로 희망을 제시하는 콘텐츠를, 조회수와 상관없이 만드는 것. 이 글도 그런 마음으로 썼다.
삶이라는 글자를 풀면 시련(ㅅ·ㄹ)과 사람(ㅏ·ㅁ)이 들어 있다. 시련은 세상이 일방적으로 던지는 재료고, 그 재료로 무엇을 만들지는 사람의 몫이다.
시련은 하늘의 몫이고, 삶은 사람의 몫이다. 같은 비에 누군가는 젖고, 누군가는 자란다. 인생은 받은 것들의 목록이 아니라, 그것으로 빚어낸 것들의 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