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라는 이름이 깨진 자리에서 시작하는 노동개혁
약자의 손에 쥐여 주려고 벼린 칼이 있다. 혼자서는 사장 앞에 한없이 작던 노동자가, 뭉쳐서 공장을 멈출 수 있도록 만든 무기 - 파업권이다. 그런데 백 년이 지난 지금, 그 칼은 누구의 손에 있을까? 성과급으로 5억을 받는 대기업 정규직과, 같은 라인 옆 협력업체에서 그 100분의 1을 받는 하청 노동자가, 똑같이 '노동자'라는 한 이름으로 같은 칼을 쥔다. 앞선 글에서 나는 그 단일한 이름이 이미 허구가 되었다고 썼다. 이 글은 그 다음 질문이다 - 약자를 지키라고 만든 무기가 어느새 가장 강한 자의 손에 들려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한 장면 - 삼성 노조가 ‘성과급 100배’에 쪼개졌다
2026년 6월, 삼성전자 최대 노조였던 초기업노조가 과반 노조 지위를 잃었다. 불과 두 달 전 7만 6천 명을 넘기며 정부로부터 법적 근로자 대표 자격을 얻었던 조직이, 58,270명까지 쪼그라들어 과반 기준(약 6만 4천 명)을 밑돌았다.
이유는 단 하나, 성과급 격차다. 2026년 임금교섭 잠정합의안에서 반도체(DS) 부문 메모리 사업부 직원은 1인 평균 5억 원대를 받게 됐는데, 가전·모바일(DX) 부문은 ‘상생’ 명목으로 600만 원을 받는다. 격차는 최대 100배. 분노한 DX 조합원이 대거 이탈했고, 그 자리를 부문별 소수 노조가 빠르게 채웠다.
이 장면을 ‘노조 내분’으로만 읽으면 핵심을 놓친다. 이건 “노동자라는 단일 우산이 물리적으로 찢어지는 순간”이다. 5억을 받는 사람과 600만 원을 받는 사람을 같은 ‘노조원’ 한 단어로 묶을 수 있는가? 시장은 아니라고 답했다. 회사는 칼 한 번 대지 않고, 성과급 곡선 하나만 비틀어 노동자들이 스스로 갈라서게 만들었다.
노동 연대를 무너뜨리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는 탄압이 아니라 차등 보상이다.
앞 글의 명명을 빌리면, 5억을 받는 DS 메모리 직원이 성안족이고, 600만 원과 함께 언제든 외주화될 수 있는 쪽이 성밖족이다. 삼성 사건은 둘이 더는 한 몸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증명했다.
곁가지 — 삼성엔 왜 노조가 여러 개일까: ‘무노조 경영’의 종말
한 가지 의문이 들 법하다. 삼성엔 왜 이렇게 노조가 여러 개일까? 사실 삼성은 수십 년간 무노조 경영으로 유명했다. 창업주의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 된다”는 말이 그 정신을 압축한다.
그 무노조는 절반은 합법, 절반은 불법이었다. 합법은 업계 최고의 임금·복지로 “노조가 필요 없게” 만든 것이고, 불법은 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미행·표적 감사·해고로 짓밟고, 회사가 조종하는 가짜 노조(어용노조)를 먼저 세워 자리를 선점한 것이다. (회사가 직원을 시켜 만드는 ‘그림자 노조’는 노조법이 가장 무겁게 금지하는 부당노동행위다.) 이 와해 공작은 법원에서 전·현직 임원들의 유죄로 확정됐고, 2020년 이재용 회장이 대국민 사과로 무노조 경영의 종식을 선언했다.
빗장이 풀리자 노조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초기업노조·전국삼성노조·동행이 난립했고 - 바로 그 난립 위에서, 성과급 100배가 이들을 다시 갈라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물음으로 돌아오자. 약자를 위해 설계된 노동의 무기는, 지금 누구의 손에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사실 몇 가지를 짚어야 한다.
2. 첫 번째 사실 - 노동의 무기는 ‘약자’를 위해 만들어졌다
노동자에게 주어진 세 가지 권리, 노동3권부터 보자. 단결권(뭉칠 권리), 단체교섭권(회사와 협상할 권리), 단체행동권(파업할 권리). 이건 자선이 아니다. 혼자서는 사용자에게 한없이 약한 노동자가, 뭉쳐야 비로소 대등해진다는 전제에서 나온 비대칭 시정 장치다. 노동자 한 명과 사장 한 명은 법적으로 대등한 계약 당사자처럼 보이지만 실제 협상력은 천지 차이고, 그 기울어진 운동장을 강제로 수평에 맞추는 지렛대가 노동법이다.
삼성 뉴스의 ‘과반 노조’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 사업장 근로자의 과반을 조직한 노조는 교섭대표노조가 되어, 회사와 1:1로 협상할 독점 자격을 갖는다. 단체협약을 비조합원에게까지 적용시키고, 탄력근로제 같은 사안에서 법적 근로자 대표가 된다. 삼성 초기업노조가 6만 4천 명이라는 선에 그토록 매달린 이유가 이것이다 - 과반을 넘기면 ‘회사와 마주 앉을 유일한 자격’을 얻고, 못 넘기면 여러 노조 중 하나로 격하된다.
그런데 과반을 잃는다고 곧장 무력해지는 건 아니다. 어느 노조도 과반이 못 되면, 전체 조합원의 10% 이상을 가진 노조들이 모여 공동교섭대표단을 꾸릴 수 있고, 발언권은 조합원 수에 비례해 나눈다. 삼성 초기업노조가 과반을 잃고도 “다른 노조와 공동 교섭단을 만들겠다”고 한 게 이것이다 - 혼자선 과반이 안 되니 연합해서 과반을 만들어, 협상 자격을 되찾으려는 셈이다.
그리고 그 모든 권리의 맨 끝에 파업권이 있다. 협상이 막혔을 때 꺼내는 최종 무기 - 멈춰서 손해를 입혀야 사용자가 테이블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을 기억해 두자. 이 무기 전체의 정당성은 “노동자는 약자다”라는 단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다. 약자이기에 비대칭 보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누가 ‘노동자’로 세어지나 - 성벽은 회사 안에도 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같은 회사에서 월급을 받아도 노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갈린다. 노조법은 “사용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 - 임원, 그리고 인사·노무를 쥔 사람 - 를 노조에서 배제한다. 노조가 회사에 휘둘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기준은 직함이 아니라 실제 역할이라, 묘한 역전이 생긴다. 직급 높은 사업부 팀장은 단순 집행자라 노조에 들 수 있는 반면, 직급 낮은 인사팀 파트장은 ‘사측을 대표한다’는 이유로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빠지는 사람은 과반을 셀 때 분자에서도 분모에서도 모두 제외된다. 삼성의 ‘약 6만 4천 명’이 전체 임직원이 아니라 ‘노조에 들 수 있는 근로자의 과반’에 가까운 이유가 이것이다.
요컨대 성벽은 회사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라, 회사 안에도 한 겹 더 있다. ‘노동자’라는 이름은 이렇게 입구에서부터 갈린다.
3. 두 번째 사실 - 무기를 쥔 성안족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먼저, 파업권이 신성불가침은 아니라는 것부터 짚자. 우리 사회는 이미 어떤 노동자에게는 파업을 금지하고 있다 - 공무원과 교사다. 이들은 단결권·교섭권은 갖지만 파업권은 법으로 막혀 있다. (전교조가 과거 ‘연가투쟁’으로 우회했다가 교사들이 줄줄이 징계받은 것도, 정식 파업권이 없어서였다.) 왜 막을까? 네 가지 논리다. ① 파업 피해가 사장이 아니라 애꿎은 시민에게 간다, ② 서비스에 대체재가 없다(동사무소 대신 갈 곳이 없다), ③ 정년·연금으로 신분이 보장된다(그 대가로 파업권을 내놓았다), ④ 임금을 노사 협상이 아니라 국회·예산이 정한다.
(군인·경찰처럼 치안·국방에 직결된 직역은 노조 자체가 아예 금지된다. 거꾸로, 공무원·교사 전체의 파업을 통째로 막는 한국 방식을 두고 국제노동기구(ILO)는 “생명·안전에 직결된 필수 서비스만 제한하라”며 과도하다고 거듭 지적해 왔다 - ‘어디까지 막을 것인가’의 선은 그만큼 까다롭다.)
이제 이 네 잣대를 성안족에게 대보자. 대기업 정규직은 사실상 정년이 보장돼 ‘구조조정’이란 말조차 못 꺼내고, 성과급으로 5억을 받으며, 협력업체 수천 곳을 멈춰 세울 파급력을 가진다. 그러면 잣대가 섬뜩할 만큼 들어맞는다. 현대차가 멈추면 협력업체·수출이 함께 멈춰 피해가 사회로 번지고(①), 정규직은 사실상 안 잘리며(③), 국민연금이 대주주라 ‘공적 소유’처럼 보이기도 한다(④의 변형). 거대 제조 대기업의 파업은 이미 공무원 못지않은 ‘준(準)공공’의 성격을 띤다. “이들은 보호가 필요한 약자”라는 노동법의 대전제가, 이 앞에서 흔들린다.
물론 완전히 같진 않다. 공무원과 달리 대기업엔 파업으로 직접 돈을 잃는 사용자(오너·주주)가 실재하고, 현대차가 안 팔리면 기아·도요타를 사면 되니 시장 대체재도 있다(②는 안 맞는다). 그래서 공무원처럼 권리를 통째로 박탈하는 것까지는 비약이다.
결국 성안족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권리를 빼앗을 공무원도 아니고, 무제한 보호할 약자도 아니다. 성안에 자리를 잡고 성문을 걸어 잠근 내부자 - 그것이 정확한 초상이다.
4. 세 번째 사실 - 파업은 약이기도, 독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파업이 늘 나쁜 것도 아니다. 한국 현대사를 보면 파업은 1997년을 기점으로 효과가 뒤집힌다.
| 시기 | 파업의 성격 | 결과 |
|---|---|---|
| 1987 | 노동자 대투쟁 | 노조 급증, 분배 개선, 내수 확대 |
| 2009 | 쌍용차 옥쇄파업 | 77일, 2,642명 실직, 사망 30여 명 |
| 2016 | 현대차 연례 파업 | 한 해 손실 3.1조 |
| 2022 | 화물연대 파업 | 직·간접 손실 10.4조 |
1987~90년대 초, 노조가 폭증하던 시기의 파업은 약이었다. 1989년 성장률은 6.4%였지만 최종소비지출은 10.4% 늘었다 - 임금 상승이 내수로 돌아, 저임금에 기대던 개발독재형 성장을 중산층이 소비로 떠받치는 성장으로 바꿨다.
반면 2000년대 이후의 파업은 점점 독이 되었다. 성안족이 생산성 이상의 임금을 가져갈수록 그 비용은 협력업체·비정규직에게 전가됐고, 대·중소기업 임금은 2배로 벌어졌다.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은 54%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차이는 분명하다. 파업이 약이냐 독이냐는 “노조가 좋다/나쁘다”가 아니라, 그 노조가 포용적이었느냐 배제적이었느냐의 문제다. 분배를 전체로 퍼뜨릴 땐 약이었고, 내부자만 살찌울 땐 독이었다. 그리고 그 변질의 책임은 노조의 인성이 아니라, 현대차 노조가 현대차 울타리 안에서만 협상하는 기업별 교섭이라는 한국 특유의 구조에 있다.
여기까지가 사실이다. 노동의 무기는 약자를 위해 만들어졌고, 그 무기를 쥔 성안족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며, 파업은 포용적일 때만 약이었다. 이제 이 사실들 위에 처방 하나를 올려놓아 보자.
5. 그래서, 생각해볼 수 있는 처방 - 무기를 뺏지 말고, 세 갈래로 제한한다
A. 파업의 ‘과잉 위력’을 정상화한다 — 소수의 점거로 회사·사회 전체가 멈추지 않게.
- 대체근로 부분 허용: 한국은 파업 중 대체인력 투입을 전면 금지(노조법 43조)해 OECD에서 예외적이다. 그래서 소수가 라인을 점거하면 회사 전체가 마비되는 비대칭 위력이 생긴다. 안전·필수 분야를 빼고 제한적으로 허용하면, 파업이 ‘마비’가 아니라 ‘압박’ 수준으로 정상화된다.
- 사업장 점거(옥쇄) 금지 명확화: 파업은 ‘근로 거부’로 한정한다.
- 필수유지업무 확대: 병원·전기·철도에 이미 적용 중인 ‘최소 인력 유지’를 반도체·자동차 같은 기간산업으로 넓혀, 멈춰도 핵심 라인과 수출은 굴러가게 한다.
B. 일자리가 아니라 사람을 보호한다(덴마크형).
- 해고는 더 유연하게, 대신 실업급여·재취업훈련은 훨씬 두텁게. “일자리를 지키지 말고 노동자를 지켜라.” 회사는 인력을 조정할 수 있고, 노동자는 잘려도 생계가 받쳐지니 철밥통에 매달릴 이유가 줄어든다.
- 임금은 직무·성과 중심으로 바꾸되, 모든 사람을 똑같이 다루지는 않는다. 진짜 고급 기술 인재는 오히려 더 주고, 생산성과 무관한 거품만 걷어낸다. (왜 이렇게 갈라야 하는지는 6장에서 본다.)
C. 쉬운 파업을 신중한 파업으로.
- 국가경제에 큰 영향을 주는 파업엔 냉각기간과 공익 중재를 둔다. 파업 찬반투표 요건을 엄격히 해 강성 집행부의 독주를 견제한다. 단, 손해배상·가압류는 위법한 폭력·점거에만 한정한다 - 쌍용차처럼 정당한 파업까지 ‘죽음의 압박’으로 짓누르면 약자 노동권마저 죽기 때문이다. (마침 2026년 시행된 노란봉투법이 이 방향으로 손배를 제한했다.)
여기까지가 ‘지금 손댈 수 있는’ 처방이다. 그런데 이 처방을 읽다 보면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왜 고급 기술자는 더 주라는 거지?” 그리고 “그냥 다 같이 똑같이 맞추면 안 되나?” 이 두 질문이 사실 이 글의 진짜 핵심이다.
6. 한 걸음 더 - 같은 ‘성안족’도 둘로 갈라야 한다
성안족을 한 덩어리로 보면 답이 안 나온다. 그들이 받는 ‘생산성 초과 임금’은 사실 두 종류가 섞여 있다.
- ① 진짜 고급 기술의 값 (반도체 엔지니어 등): 이건 거품이 아니라 세계가 부르는 시장가다. 미국·대만이 더 높은 값에 데려가려 줄을 서 있다. → 깎을 게 아니라 국가적으로 더 줘서 붙잡아야 한다.
- ② 프리라이딩(무임승차) 거품 (근속만으로 따라오는 부분 + 강성 노조의 교섭력으로 부풀린 몫): 생산성과 무관하게 ‘성안에 자리를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따라붙는 몫이다. → 손댈 곳은 오직 여기다.
같은 성안족이라도 ①은 국가의 자산이고, ②는 구조의 거품이다. 둘을 구분하지 못하고 뭉뚱그리면, 거품을 잡으려다 인재까지 내쫓는다. 그러니 어떤 노동개혁이든 이 ①/② 분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성안족을 통째로 적대하는 것도, 통째로 옹호하는 것도 게으른 답이다.
그럼 ‘스웨덴처럼’ 다 똑같이 맞추면 안 될까
여기서 흔히 나오는 모범답안이 스웨덴식 연대임금이다. “같은 일을 하면 회사가 돈을 잘 벌든 못 벌든 똑같이 준다”는 원칙. 잘나가는 기업의 임금을 시장보다 낮게 묶어 격차를 줄이는, 우아해 보이는 설계다.
그러나 이 처방은 한국에 독이다. ①을 때리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기업의 고임금을 시장가 아래로 누르면, 600만 원 받던 반도체 엔지니어가 300만 원에 묶이고, 그 결과 미국이 700만원을 불렀을 때 안갔던 사람들이 우루루 떠난다. 인재가 자산의 전부인 글로벌 경쟁국에서 천장을 깎는 건 자해다. 실제로 스웨덴도 고소득 인재와 기업가들이 빠져나갔다.
정리해 보자. 노동의 무기는 약자를 위해 만들어졌고(사실), 그 무기를 쥔 성안족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며(사실), 파업은 포용적일 때만 약이었다(사실). 여기서 하나의 가설이 선다 - 무기를 뺏지 말고 겨냥점을 바꾸자, 성안족을 지킬 고급 기술(①)과 걷어낼 거품(②)으로 갈라 보자
나는 이 가설이 정답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이중구조를 푸는 ‘바로 그 방법’은 아직 아무도 증명하지 못했다. 산별교섭도, 동일노동 동일임금도 한국에선 효과가 확인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5억을 받는 엔지니어는 더 받아야 하는가, 덜 받아야 하는가? 그 옆에서 ‘성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따라가는 몫은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가?


